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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박동춘의 차 이야기] 11. 우리나라의 찻그릇

  • 관리자
  • 2024-06-08   조회수 : 26

[박동춘의 차 이야기] 11. 우리나라의 찻그릇

  •  현불뉴스
  •  
  •  승인 2024.05.31 14:29

中 제자기술 습득… 자체 찻그릇으로 발전

통일신라 중국 다완 수입 의존
고려시대 비약적인 발전 이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자양각국화문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자양각국화문완.

우리나라에서 차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대략 7세기인 통일신라 시기이다. 당으로 유학을 다녀온 선종 구법승들에 의해 전해진 차는 주로 부처에 대한 공양물로 사용돼 오다가 대렴(大廉)이 중국으로부터 차 종자를 들여온 시점(828)인 9세기 초를 전후로 차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제자(製瓷) 기술이 완성되지 못했던 통일신라에서는 중국의 월주요(越州窯)나 형요(越窯) 등에서 다완을 수입했다. 이 다완들은 육우(陸羽)가 〈다경(茶經)〉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체가 낮고, 측면이 직사선을 이루며 넓어지는 형태로서 덩이차(餠茶)를 자다법(煮茶法)으로 마실 때에 차와 차거품을 함께 마시기에 편리했다.  

고려시대에는 제다(製茶)와 탕법(湯法), 다구(茶具) 등 모든 방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는데, 고려 초기청자의 생산 기종 대부분이 다완이었다는 점은 중국에서도 천하제일이라 찬하였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 고려청자의 제작이 차에 대한 관심과 수요에서 비롯됐음을 시사한다. 특히 고려의 초기 청자는 육우가 예찬한 월주요 자기의 형태와 제자기술을 이식한 것으로 알려져 차 문화와 함께 양자 간의 연관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북송의 서긍은 고려의 다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송에서 하사한 것 이외에, 상인들도 와서 (차를) 판매하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제법 좋아하여 다구(茶具)가 훨씬 정연해졌다. 금화오잔(金花烏盞)·비색소구(翡色小)·은로(銀爐)·탕정(湯鼎)은 모두 중국 제도를 흉내 낸 것들이다.
-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중

위의 금화오잔(금빛 장식의 검은 잔)은 흑유잔을, 비색소구(비취색의 작은 사발)는 청자 다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시대 송에서는 단차의 새하얀 차색을 돋보이게 하는 건요의 감흑색 토호잔(兎毫盞)을 최고의 다완으로 여겼다. 고려 유적에서도 건요를 비롯한 중국제 흑유잔이 출토되어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청자 잔들 중에는 흑유잔처럼 잔의 전면이나 외부를 검은 철 안료로 시유한 사례가 종종 나타난다.

이러한 청자 잔들을 살펴보면 그 형태나 비례가 단차를 점다하기에 기능적으로 특화된 흑유잔과 닮아있다. 아마도 청자 생산이 주류였던 고려에서는 청자를 사용해 단차를 마시기에 적합한 다완을 제작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고려 중기로 접어들면 기체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잔에 깊이감이 더해진 형태의 다완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이는 다완에 찻가루를 넣고 끓인 물을 부은 다음 다시(茶匙)나 다선(茶)으로 휘저어 풍성한 차 거품을 만들어 내기에 유리한 구조이면서도 다완을 손으로 감싸 쥐거나 구연에 입술을 대었을 때 거슬림 없이 부드럽고 편안한 형태였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차를 탕(湯)이나 약(藥)으로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는 차를 가루 내어 마시지 않고 찻잎을 우려서 마시는 음다(飮茶) 방식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청자 중에는 뚜껑이 있는 통형의 잔(有蓋筒形盞)이 있는데, 여기에 이러한 종류의 차를 담아 마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차를 가루 내어 섭취하는 자다법이나 점다법과 다르게 찻잎을 우려서 마시게 되면 향이 쉽게 날아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차와 음다 방식이 공존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다양한 형태의 찻그릇들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새 왕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사회, 정치,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변혁이 이뤄졌다. 그 중 하나였던 숭유억불 정책과 함께 불교 승려와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주도되어 온 차 문화는 쇠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차 문화는 불교 승려들에 의해 잔존하여 명맥을 이어갔고, 차는 승려들과 학문적으로 교유하던 선비들에게 탐미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차 문화를 재창하고 부흥시킨 다인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초의 선사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이다.  

잔은 설백색이 가장 좋고, 푸른빛이 도는 백색 잔도 차색을 손상시키지 않으므로 그 다음으로 친다.                                                      

〈다신전〉은 초의가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수록된 명대 장원(張源)의 〈다록(茶錄)〉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정리한 글이다. 초의 선사(1786~1866)는 역대 다서들을 연구함으로써 ‘초의차’를 완성하여 조선의 제다를 정립했는데, 이는 찻잎을 덖어서 만드는 ‘산차(散茶)’였다. 산차는 끓인 물을 다관(茶罐)에 찻잎과 함께 넣고 우려낸 다음 찻잔에 따라서 마신다. 때문에 명이나 청과 마찬가지로 맑고 투명한 차색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줄 수 있는 백자가 가장 좋은 찻잔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선진의 차 문화를 동시대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내재화 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 차 문화 수용 초기에는 찻그릇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지만, 이내 중국의 제자기술을 습득하여 자체적인 찻그릇의 생산을 이뤄냈다. 이는 주변의 다른 아시아 국가나 유럽 등에 비해 수세기를 앞선 독보적인 발전이었으며, 한국의 수준 높은 차 문화와 탄탄한 향유 층의 존재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출처 :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