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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박동춘의 차 이야기] 13. 극품의 차는 어땠을까

  • 관리자
  • 2024-07-01   조회수 : 62

[박동춘의 차 이야기] 13. 극품의 차는 어땠을까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24.06.28 15:47

한반도 제다 주도 그룹은 ‘도당구법승’

차, 수행승이 문인에게 보내는 귀한 예품
극품의 차, 승려·왕실 귀족 등에 집중돼

북송대 건안 흑유 토호 찻잔.
북송대 건안 흑유 토호 찻잔.

차는 지인과 나누는 귀한 선물로, 이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깊은 신뢰나 우정, 이상적 삶을 지향하는 의지를 공감하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임금이 나라에 공이 있는 신하에게 차를 하사한 것이며 수행승이 도가 높은 스승에게 차를 올렸고, 수행이나 수신을 함께 하려는 사람끼리 나누는 정다운 선물이다. 이런 차의 순기능을 공감한 미담은 여러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불교를 통해 한국에 소개된 차는 수행승이 문인에게 보내는 귀한 예품으로 서로 간의 격의 없는 우의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차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승속을 불문하고 속 깊은 통유의 미덕을 드러내는 증표였던 것이다. 이처럼 사람 간의 신뢰와 배려를 극명하게 품고 있는 차를 주고받았던 사실은 우리의 풍속을 순화시킨 정심음료로, 삶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드는 원천적 에너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 이로움을 줬던 극품의 차를 만들던 실체는 어디였을까.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차에 대한 이해와 열망에 따라 더욱더 정밀한 향미와 기세를 드러낸 차를 만들어 차를 만드는 기법이나 유형에 변화를 가져왔으니 이는 바로 덩이차(餠茶)에서 단차로 발전되었고 단차에서 더욱 정밀한 공정을 가미한 연고백차가 출현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산차(잎차)가 만들어졌지만 이를 음용하는 방법은 가루차를 만들어 점다(點茶)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극미한 차에 대한 욕구는 차를 만드는 공정 과정의 치밀성이 요구되고 채다 시점도 점차 빨라지는 경향을 보임에 따라 맥아나, 작설처럼 여리디 여린 차의 싹이 필요했다. 이런 송대 음다의 흐름은 고려시대도 동일한 흐름을 보임에 따라 단차와 연고백차가 유행했으며, 극품의 차에 대한 수요는 사원 수행승과 왕실 귀족, 문인으로 집약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조치로 고려에서는 다소(茶所)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제다를 주도했던 그룹은 차에 밝았던 ‘도당구법승’이다. 9세기 회당사신 대념에 의해 당에서 차의 씨를 들여온 이래 차를 가꾸고 만들던 신라 시대 차의 주도 세력은 도당구법승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용 차를 공납하는 다소(茶所)가 만들어져 집약적이고도 전문화된 숙련 제다인에 의해 좋은 차를 공급 받았을 것이니 극품 차의 생산처는 왕실과 사원 등으로 양립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극품의 차의 생산이 왕실과 사원으로 집약된 경향은 신라나 고려 시대처럼 중국의 당송 시대에도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이런 사실은 선종 사원의 수행승이 좋은 차를 만들었고, 이에 영향을 받았던 육우가 제다를 집대성한 사례가 그것이다. 

이후 새로운 극품의 차를 만들었던 주도 세력은 황실용 차를 만드는 어다원(御茶園)이 조성된 10세기 말 이후 큰 변화를 보인다. 바로 새로운 명차의 생산을 주도하는 그룹으로 황실이 부상되는데, 이는 11세기 송나라 정위(丁謂)가 황실에 진상한 대용봉단(大龍鳳團)과 채양(蔡襄, 1012~ 167)에 의한 소용봉단(小龍鳳團)의 출현에서 드러난다. 결국 송나라에서는 차를 전문으로 관리하는 관리를 파견해 좋은 차를 만들었는데, 이는 건안(혹 건주) 지역이 새로운 명차산지로 부상되었다는 점이다. 

이후 이런 차의 산지에서 생산된 명품차를 상징하는 차로 세상에 회자되었는데, 몽정차나 육안차, 쌍정 일주차 등이 그것이다. 11세기 인물 채양은 차의 품평에 능한 전문가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런 사실은 하수방의 <다동> ‘능인석봉생(能仁石縫生)’조에서 확인된다. 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채군모는 차를 잘 선별한다. 건안 능인원에는 차가 석봉 사이에서 자라는데, 스님이 (이 차를) 따서 차를 만들어 8덩이를 얻어 석암백이라 불렀다. 석암백 여덟 덩이 중에 네 덩이는 채군모에게 보내고 네 덩이는 한림 왕우옥에게 보냈다. 
섣달 그믐날 채군모가 소환되어 대궐로 돌아왔는데, 우옥이 차를 갈아 채군모를 대접했다. 채군모가 찻잔을 들고 아직 맛보지도 않았는데, 문득 말하길 이 차는 능인의 석암백과 매우 비슷한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우옥이 그 말에 반신반의하여 차를 담은 봉지를 찾아 확인하고는 곧바로 채군모의 말에 수긍했다.(蔡君謨善別茶。建安能仁院有茶生石縫間,僧採造得茶八,號石岩白。以四遺蔡,四遺王內翰禹玉。歲除,蔡被召還闕,禹玉以待蔡,蔡捧未嘗輒曰:此極似能仁石岩白。禹玉未信,索帖驗之,乃服)


채군모는 채양의 자(字)이다. 복건성 선유현 사람으로 차에 밝았을 뿐 아니라 글씨와 문장에도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 경력 7년(1047) 복건로전운사(福建路轉運使)로 제수되었으니 이는 복건 지역의 차를 관리하는 관리로 부임된 것이다. 건안은 복건성에 위치한 지역으로 능인원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선원이다. 그런데 건안의 능인원에는 석봉 사이에서 특품의 차가 자라고 있었는데 이 차의 싹으로  만든 차를 석암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귀한 차를 차에 밝은 인사에게 선물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능인원 스님들은 능인원 석봉 사이에서 나는 차로 만든 여덟 덩이차를 채군모와 왕우옥에게 보낸 연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이어지는 글에서 드러나는데, 바로 채군모와 왕우옥이 차에 밝았던 애호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왕우옥(1019~1085)은 섣달 그믐날 복건 전운사에서 수도 대궐로 복귀한 채군모를 위해 직접 차를 갈아 대접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채군모가 얼마나 품다에 능한 사람이었는지를 드러낸 대목은 바로 그가 차 맛을 보지도 않은 채 찻잔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 능인원의 석암백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실제 왕우옥은 채군모의 이 말에 반신반의하여 차를 담은 봉지를 확인한 후에야 채군모의 품다 실력의 출중함에 경탄을 금하지 않았으리라. 동시대의 인물 채군모와 왕우옥은 오묘한 차의 세계를 드러낸 명차가 생산되었던 시기에 차를 즐긴 문인들이 서로의 깊은 우정을 차로 대변했다는 점에서 감동의 여운이 긴 미담이라 생각한다. 

 

출처: 현대불교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