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4.09.04 09:27
조선 후기 이덕리(1725~1797)가 지은 〈기다(記茶)〉는 차를 팔아 국익과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될 정책을 제안했지만,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그의 제안이 얼마나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제안은 실용화되지 못한 건의서에 불과하지만, 최초로 차의 실용론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중국이 차를 수출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오랑캐를 방어하는 기이한 재화로 삼았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차의 활용에 주목한 그의 〈다설〉과 〈다사〉, 〈다조〉는 차문화사에서 주목할 문헌 자료라 생각한다. 차를 이용한 그의 부국에 대한 열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차가)울타리나 섬돌 곁에서 자라고 있지만 흙이나 숯처럼 쓸모없는 물건처럼 여기며 그(차) 이름조차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다설〉 한 편을 지어 다사를 아래에 조목별로 나열하여 당국자가 시행해 볼 것을 건의하는 바이다.(我東則産於芭籬堦戺 而視若土炭無用之物 幷與其名而忘之 故 作茶說一篇 條列茶事于左方 以爲當局者建白措施之地云爾)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18세기 말, 당시의 차 문화는 거의 쇠퇴하여 차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미 차를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오랑캐를 막는 재화로 삼을 만큼 차의 경제적 가치를 국익에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현실은 지천으로 자라는 차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늘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그는 유배된 몸이었지만, 지천에 널려 있는 차를 이용하여 나라와 백성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던 의지를 드러냈으니 그의 충심은 이처럼 빛났다.
결국 그가 제안한 큰 뜻은 나라의 경제력이 넉넉해지면 백성도 힘을 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다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배로 서북지역의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운반하여 차를 은과 맞바꾸면, 주제의 고급 은으로 만든 그릇과 촛대가 물길을 따라 잇달아 들어와 지역마다 배당될 수 있다. 차를 말과 교환한다면 기주북쪽 지역의 준마와 양마가 성 밖 쓸모없어 놀리는 땅에 가득하고 교외 목장에 넘쳐날 수 있다. 차를 비단과 바꾸면 서촉 지방에서 짠 고운 비단을 사녀들이 나들이옷으로 걸치고 깃발의 천도 바꿀 수 있다. 나라의 재정이 조금 나아지면 백성의 힘이 절로 펴질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앞서 내가 황량한 들판의 구석진 땅에서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을 얻어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舟輸西北開市場 以之換銀 則朱提鐘燭 可以軟川流 而配地部矣 以之還馬 則驥北之駿良駚騠 可以充外閑 而溢郊牧矣 以之煥錦段 則西蜀之織成綺羅 可以袨士女 而變旋幟矣 國用稍優 而民力自紓 更不消言 而向所云得於荒原隙地 自開自落之閑草木 而可以裨國家裕生民者 殆非過言)
윗글에서 알 수 있듯이 차를 팔아 은으로 교환하여 물자가 풍부해지면 여러 지역으로 좋은 그릇이 확산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차를 좋은 말로 바꾸면 말이 넘쳐나 적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차를 활용한 그의 제안은 차로 비단을 교환하면 온 백성이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을 수 있으며 깃발을 만드는 것에도 기여할 것이라 하였다.
결국 그는 차를 팔아 살림에 필요한 용기와 옷 등 미풍양식에 필요한 물자를 풍족하게 마련하고자 하였고, 말을 길러 국방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국가의 경제력이 나아지면 백성의 살림살이도 넉넉해질 것이란 그의 확신은 〈다설〉에서 확인된다. 더구나 지천에 널려있는 차라는 재화를 이용해 국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그의 견해는 탁견이었지만 실천할 수 있는 시대환경이 아니었다. 사람이나 보잘것없는 초목도 그 쓰임에는 때를 얻어야 하는 법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假定)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차에 대한 건의가 정책으로 채택됐다면 조선 후기 차 문화의 흐름은 상상하지 못할 문화 유형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차 문화사에 있어서 가장 발전된 문화 형태를 구현했던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차와 청자 다구, 차를 즐기는 계층의 문화 수준 등이 송나라와 비견될 정도로 발전된 차 문화를 구가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에서 경제적 산물로 차를 활용한 사례는 드물다. 다만 왕실 귀족층, 사원의 승려, 문인들의 정신적 향상이나 문예의 가치를 드높이는데 필요한 정신 음료로 그 가치를 중시했다. 실로 차의 원천적인 진수를 향유했던 시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송나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매개물로 차를 즐기는 한편 차를 활용하여 황실의 경제력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으로 삼았으니 이는 전매 제도인 각다법(차의 세금법)에서 드러난다.
아무튼 이덕리의 〈기다〉는 후일 강진 백운동 이시헌(1803~1860)의 집안에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이를 통해 그의 차 교역에 대한 제안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의 〈기다〉에는 식은 차를 마신 후 몸의 변화를 언급한 내용인데, 이는 차를 어떻게 마시는 것이 사람에게 이로운지를 알려주는 정보이다. 바로 그가 막걸리를 몇 잔 마신 후 곁에 냉차가 있는 것을 보고 반잔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목에 가래가 끓어올랐다. 10여 일을 뱉어내고서 겨우 나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현대인의 차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정보이다. 바로 식은 차를 마시면 가래가 생긴다는 점이니 식은 차는 몸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해를 준다는 사실이다.
출처: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