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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박동춘 소장의 茶이야기] 18. 다산 정약용과 茶문화

  • 관리자
  • 2024-09-24   조회수 : 26

[박동춘의 차 이야기] 18. 다산 정약용과 茶문화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24.09.13 16:54
 

茶를 사랑했던 조선 후기 대표 지식인 

강진 유배 직후 아암 스님 인연
다산, 차에 대한 식견 확장 계기
차 활용 국부론까지 저술하기도

다산 정약용 진영. 강진문화원 소장, 김호석 作.
다산 정약용 진영. 강진문화원 소장, 김호석 作.

조선 후기 차를 활용한 부국론과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계책을 제안한 인물은 이덕리(1725~1797)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특히 다산의 차에 대한 식견은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라 생각한다. 물론 그가 강진으로 유배되기 이전부터 차를 알았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실제 어느 시기부터 차를 즐겼는지를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1778년 화순에 있을 때 지은 〈성주암에 올라(登聖住庵)〉에서 “차로는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아/ 거듭 맑은 돌 샘물을 마시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차의 진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나이 19세 무렵 예천 정당의 동쪽에 위치한 반학정에서 지은 〈여름날 지정에서 절구 시를 짓다(夏日池亭絶句)〉에서 “어린 기생 차를 전해 주려고 대 사립문에 이르렀네(小妓傳茶到竹扉)”라고 하였다. 이어 1781년경 그가 지은 〈미천가(尾泉歌)〉에서는 찻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홍수 만나 산에까지 물이 차도 넘치지 않고(巨浸稽山而不活)
가뭄 들어 쇳덩이가 녹는데도 마르지 않네.(大旱流金而不竭)
일천 사람 길어가도 모자람이 없고(千人來汲而不)
오물이 온통 널렸어도 더럽지가 않네(濊惡繞而不染)
옥처럼 맑은 우물이 넘쳐 천만 년을 흐르는데(玉溢兮絡古流)
맑은 약수 떠 마시니 목구멍이 상쾌하다(瓊漿兮爽咽喉)
용단 차를 다려 고질병을 다스리니(爲試龍團治癖疾)
해맑기는 수정이요, 달기는 꿀 맛 같네.(瑩如水精甘如蜜)
육우가 만약 오신다면 어느 곳에서 (물을) 찾을까(陸羽若來何處尋)
원교의 동쪽이요, 학령의 남쪽이라.(員嶠之東鶴嶺南)

앞에 인용한 시는 다산이 20세 즈음에 지은 것인데, 미천은 좋은 샘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길어갔던 정황을 드러낸다. 더구나 그가 마셔본 미천 샘물은 목을 상쾌하게 만드는 물이라고 한 점이 눈에 띈다. 

그러므로 용단 같은 최상의 차를 이런 좋은 물로 끓여야만, 묵은 체증이 내려가고 오래된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차의 효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좋은 물을 알아보는 사람은 차의 원리를 터득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다산은 이미 20세의 나이에 차의 근본을 이해했던 인물이라 하겠다. 

그가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1805년 차에 밝은 아암 스님과의 만남은 차를 통해 척박한 유배지의 환경을 극복할 매개물을 얻었을 뿐 아니라 묵은 병을 치료하는 차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가 차를 깊이 좋아한 계기는 연담 스님에게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연유를 살펴보면, 그의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1777년경이다. 당시 연담 스님은 화순 동림사에서 수행하셨으니 다산의 부친과 교유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산이 이듬해인 1778년 화순 동림사에서 과거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연담과 부친의 인연 때문이었다. 특히 연담은 차에 밝았던 대흥사 고승이기에 동림사에 공부하던 다산에게 차를 대접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연유에서 다산이 차의 오묘한 세계를 짐작하게 한 계기는 연담에서 시작된 것이라 본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인연은 예측하기 어렵다. 

결국 연담 스님과 다산의 인연은 아암 스님(1772~1811)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다산과 차의 만남은 우연은 아닌 듯하다. 강진 유배기에 차에 흠뻑 빠진 다산의 상황을 나타낸 것은 1805년 겨울 아암 스님에게 보낸 ‘차를 구하는 글(乞茗疏)’에서 “저는 요즘 차를 탐내어 약으로 마시고 있습니다”라고 한 대목이 그것이다. 차를 마시면 “막힌 것을 풀어주고 배 속에 생긴 덩어리를 제거하기” 하였기에 풍토병에 고생하던 그가 차에 의지하여 “마침내 이찬황의 고질적인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찬황은 당나라 사람 이덕유를 말한다. 차에 밝았던 그는 당대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되는 육우와 쌍벽을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이찬황처럼 차를 좋아하여 고질병이 생길 정도가 되었던 다산은 박학했던 학자답게 육우의 〈다경〉3편을 탐독해 육우가 말한 차의 핵심을 터득했다. 이어 차를 마신 후의 몸과 마음의 아름다운 변화 과정을 노래한 노동의 〈칠완다가〉을 읽어 차의 대체(大體)를 알아 버렸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차를 마시면, 사람의 정기(精氣)를 침식시켜 기운이 줄어든다는 기무경의 말도 익히 알고 있었다고 하니 그는 이미 강진 시절에 차의 이론이나 차의 정수를 관통했던 사실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다산이 차를 좋아하여 다벽(茶癖)을 얻은 것은 1805년경이라는 점에서 그가 제안한 차를 활용한 국부론은 우연히 드러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진 유배 시절 차의 원리와 이로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이기에 차를 생산하고 판매하여 나라와 백성에게 두루 유익한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의 차를 통한 국부론은 바로 〈상두지 둔전조(桑土誌屯田條)〉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되었다. 첫째, 영호남 곳곳에 차 밭이 있으니 쌀 1말 정도를 낼 세금을 차 1근으로 대신 납부하거나 차 10근으로 군포를 대신 받치게 해 준다면, 수 십 만근의 차를 쉽게 얻을 수 있고, 둘째 이렇게 모은 차를 배를 이용하여 중국 서북 지방 시장에 팔면, 10만근의 차를 가지고 2만근의 은을 얻어서 은전 60만 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경제 효과는 결국 한 두 해 만에 45둔(屯)의 둔전(屯田)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이런 수치의 경제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차의 값을 산출한 방법이다. 바로 월차(越茶, 중국차)의 가격은 차 1냥이 은 2전으로 판매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실증적인 차에 대한 연구는 중국의 차 전매 제도를 연구한 〈각다고(茶考)〉에서도 드러나지만, 그의 제안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 당시의 정치상황이 아쉬울 뿐이다. 

 

출처: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