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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박동춘의 차 이야기] 19. 차 마시는 환경

  • 관리자
  • 2024-10-09   조회수 : 30

[박동춘의 차 이야기] 19. 차 마시는 환경

  •  현불뉴스
  •  
  •  승인 2024.10.08 15:11

‘꽃 앞에서 飮茶’ 오래된 논쟁거리 

 당송代 문인들 차에만 집중
“풍경·꽃은 차에 방해” 주장
 명대엔 꽃과 어우러짐 강조

초의소장품 흑색 다관.
초의소장품 흑색 다관.

싱그러운 연둣빛, 환한 향기와 감미롭고 빈틈없는 차 맛은 눈과 코, 혀로 느끼는 미묘한 차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차향이 코끝을 두드린다’고 하였다. 이보다 심신으로 퍼지는 명쾌한 기세를 느끼는 것이 차를 즐기는 가치이다. 

차를 마시면, 맑고 따뜻한 다탕(茶湯)이 목젖을 타고 넘어가면서 환하고 시원한 기세가 온몸으로 퍼져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어 머리와 목덜미, 등,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불평했던 마음과 몸이 편안해지고 얼굴과 등에서 촉촉하게 땀이 난다. 부드럽고 얇은 실크로 온몸을 감싸는 듯, 포근하고도 경쾌해진다. 이처럼 차를 마신 후의 변화를 노동(盧仝)은 〈칠완다가(七碗茶歌)〉에서 “(차를 마시니)신선과 통하며,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스물 스물 이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심신을 안정 시켜주는 차는 어떤 환경에서 마시는 것이 좋을까. 이에 대한 견해는 시대와 나라, 사람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이겠지만, 명대 전예형(田藝衡 1524~?)의 〈자천소품(煮泉小品)〉을 참고할 만하다. 그 내용은 살펴보자.

당나라 사람은 꽃을 보면서 차를 마시는 것을 (차를 마시는)정취를 경감시키는 연유라 여겼다. 왕개보의 시에 금곡원의 아름다운 꽃 앞에서 함부로 차를 다리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마음을 꽃에 두고, 차에 둔 것이 아니다. 나는 금곡원 꽃을 언급한 앞의 글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 잔의 차를 들고 산에 핀 꽃을 보면서 차를 마신다면, 마땅히 차를 마시는 운치에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고아주(좋은 술)를 구하겠는가.(唐人以對花茶爲殺風景故 王介甫詩云金谷千花莫漫煎 其意在花非在茶也 余意以爲金谷花前信 不宜矣 若把一對山花之 當更助風景 又何必羔兒酒也) 

윗글에 의하면, 당나라 문인들은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차를 마시면, 차를 즐기는 아취가 줄어든다고 여겼다. 이는 송나라 문인들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 글에 인용된 왕개보는 북송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시문에도 능했던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을 말한다. 왕개보는 그의 자(字)이다. 반산(半山)이라는 호를 썼다. 그런데 왕안석은 서진 때 대 부호였던 석숭(石崇, 249~300)의 별장, 금곡원에 핀 아름다운 꽃을 언급하였다. 금곡원은 서진 때 최고의 부자였던 석숭의 호화스런 집이다.

관직을 이용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 막대한 부를 쌓았던 그는 낙양 서쪽에 금곡원을 지어 당대의 명사들을 초대하여 풍류를 즐겼다. 이 무렵 금곡원은 천하의 문장가와 권력자들이 모여드는 사교의 장이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시를 지어 자신의 문재를 뽐냈으며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말의 술을 마셔야 했다고 전한다. 금곡주수(金谷酒數)라는 말은 이로부터 연원되었다. 그러므로 왕안석이 말한 금곡천화(金谷千花)란 석숭의 별장을 장식했던 기화요초를 말하는 것으로, 이 금곡원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아름다웠는지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당대와 송대 문인들이 차를 즐길 때 아름다운 꽃이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면 차에 집중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는 금곡원의 아름다운 꽃 앞에서 차를 함부로 다리지 말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차 한 잔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를 통해 당송 때에 문인들이 차를 대하는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차를 대하는 마음은 명대에 이르러 전대와는 다른 변화를 보이는데, 이는 전예형의 글에서 확인된다. 전예형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주유하는 과정에서 견문을 넓혔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한 전력도 보인다. 그의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휘주휴저교유(徽州休敎)’에 제수되었다가 만년에 전당(塘)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삶은 소박한 문인의 전형을 보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가 꽃을 마주하고 차를 마시는 정취는 오히려 차를 즐기는 아취에 도움을 준다고 본 것이리라. 그러므로 당송대의 문인들이 차에 집중하려는 태도를 드러낸 반면 명대에는 차와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에서 차를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그의 〈자천소품〉에서는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茶如佳人)”라고 한 당대 육우의 견해를 매우 오묘한 식견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산림에 사는 사람에게는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此論最妙 但恐不宜山林間耳)는 뜻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특히 당송 때에 유행했던 고형 단차나 편차는 연에 갈기 때문에 차의 진미를 손상 시킨다(茶之團者片者 皆出於鎧之末 旣損眞味)라고 하였다. 

당송 때에 유행했던 고형차는 제다 과정이나 가루를 만드는 공정에서 차의 진미를 손상시킬 수 있는 단점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본 것이다. 아무튼 명대 문인 중에는 당송 때에 차보다 명대에 생산된 차가 더욱 좋다는 견해를 보인다. 전예형의 〈자천소품〉에 “다시 기름때를 더하니 가품은 아니다. 모두 명대의 차와 같지 못하다(復加油垢,非佳品,總不若今之芽茶也)”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바로 명대 문인들은 차의 순수성, 즉 천연성이 보존된 차를 좋은 차로 인식했다(盖天然者自勝耳)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잎차는 몇 번 우리는 것이 합리적일까. 이는 명대 허차서(許次쌭)의 〈다소(茶疏)〉에서 “한 호(壺)에 차는 두 순배 차는 마실 만하다. 첫 번째 따른 차는 싱그럽고 맛이 좋으며, 두 번째 잔은 달고 순후하다. 세 번째 잔은 차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一壺之茶但堪再巡 初巡鮮美 再巡甘醇 三巡則意味盡矣)”라고 한 것이 눈에 띈다. 이와 유사한 방법은 바로 대흥사 응송 박영희 스님의 일탕법이다. 그는 평생 한 번만 차를 우려내는 탕법을 고수했는데, 이는 차의 진기(珍氣)만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고안된 탕법으로 대흥사에서 연원된 다풍이라 하겠다. 

출처: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5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