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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박동춘의 차 이야기] 21. 품다삼매(品茶三昧)

  • 관리자
  • 2024-11-11   조회수 : 26

[박동춘의 차 이야기] 21. 품다삼매(品茶三昧)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24.11.06 14:45
 

은거 문인, 茶로 삼매에 들다

明 건국 주원장, 소주·강남 지역 문인 배척해
해당 지역 문인들 은거하며 안빈낙도 삶 살아

심주의 동장원책 중에서 졸수암 전경. 심주의 산수화와 글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심주의 동장원책 중에서 졸수암 전경. 심주의 산수화와 글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차를 즐기는 경지를 ‘품다삼매(品茶三昧)’라고 말한 사람은 명대 오문화파(吳門畵派)를 개창한 심주(沈周, 1427~1509)이다. 종래에 차를 다리는 경지를 ‘전다삼매(煎茶三昧)’나 ‘팽다삼매(烹茶三昧)’ ‘점다삼매(點茶三昧)’ 등으로 표현하였고, 조선 후기 김정희(1786~1856)가 명선(茗禪), 다삼매(茶三昧)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가 있다. 그런데 명대 대표적인 산림에 은거한 문인 심주(沈周)는 다사(茶事)의 고상한 품격을 ‘품다삼매(品茶三昧)’라 말했으니 이는 그가 은거한 문인으로 차의 심오한 경지를 경험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시·서·화에 밝았던 문인이었다. 원대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화풍에 몰두했고, 만년엔 오진(吳鎭, 1280~1354)의 화풍을 배워, 산수화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점도, 그를 통해 명대 은거 문인의 차에 대한 취향과 격조를 살펴 볼 수 있는 것도 주목할 사항이다. 한편 그가 강남의 문인 집안 출신으로, 그의 선대들도 서화에 능했던 가문(家門)이었지만,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시와 그림, 글씨, 차를 즐기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동시대 인물 문징명(文徵明1470~1559)은 그를 “산 중에 신선(山中神仙)”이라 칭송했던 것이다. 

16세기 초까지 소주 지역을 근거로 활동했던 심주는 문징명·당인(唐寅, 1470~1523)·구영(仇英, 1482~1559) 등과 명사가(明四家)로 자리를 나란히 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평생 산림에 은거했던 연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치세(治世)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생각한다. 명나라 건국 초기 황제 주원장(1328~1398)이 서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황실로 모여들었지만, 왕권이 강화되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에 염증을 느낀 문인, 화가들은 산림에 은둔하는 풍조가 생겼다. 

한때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에 동조하지 않았던 소주 지역뿐 아니라 강남 지역의 문인들을 배척하여 과거나 등용을 하지 않는 정책을 폈던 것도 강남 문인들이 산림에 은거하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던 계기가 되었다. 이런 시대 환경은 심주에 영향을 미쳐, 그 또한 산림에 은거하며 시·서·화·차에 몰두할 뿐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15~16세기 초엽에는 은거 문인들이 차를 즐기는 아취를 시문과 그림에 담았기에 이들의 소박한 삶 속에 차가 주는 위안을 만끽했던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심주가 품다삼매를 언급한 것은 〈발다록(跋茶錄)〉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초해 선생은 산림에 사는 진실하고도 참된 군자이다. 평소 높은 벼슬아치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날마다 청산을 굽어보고 흰 구름을 바라보면서 한 잔의 차로 반평생을 보냈으니 실제 품다삼매를 얻어 (차를) 보좌로 두었던 것이다. (이런 경지는)육우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초해 선생은 차의 바른 역사 기록자(동호)라 하여도 좋으리라. (樵海先生 眞隱君子也 平日不知朱門爲何物 日偃仰於靑山白雲堆中 以一瓢消磨半生 蓋實得品茶三昧 可以羽翼 桑苧翁之所不及 卽謂先生爲茶中董狐可也)

윗글은 명대 문인들, 즉 산림에 은거하면서 일상을 검소하고 고상하게 살았던 문인의 일상을 드러낸 셈이다. 실제 초해 선생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심주와 뜻이 통했던 지기(知己)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초해 선생은 참된 은군자(隱君子)였다는 심주의 평가는 그 자신도 초해 선생처럼 청산과 흰 구름 등, 속기가 없는 자연을 좋아했던 인물로, 초해 선생과 같은 이상을 품었다고 확신하였다.

늘 차를 즐기면서 참(眞)을 지향했던 문인들에게 차와 자연은 동일한 격물(格物)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심주나 초해 선생 같은 은둔한 군자는 붉은 칠을 한 대문과 화려하게 치장한 권문세가나 구중궁궐에 나갈 뜻이 없었다. 다만 차 한 잔과 자연이 이들의 곁을 지켜 주는 참된 보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차는 사람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기에 오랜 역사 속에서 간단없이 이어졌던 것일까. 차를 마시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답답함과 피로감을 비갠 가을 하늘처럼 상쾌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한편 심주는 초해 선생은 차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라서 그가 즐기는 차의 고상함은 차 문화를 집대성한 육우(陸羽)도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초해 선생은 차의 참된 원리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기록자라 평가한 것이니 이는 검박하고 고상한 차의 세계를 만끽한 명대의 은거 문인의 자부심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명대는 산차(散茶, 잎차)가 대세를 이뤘던 시대였다. 하지만 주원장이 단차 생산을 금지하는 조칙이 반포하기 이전엔 가루차, 즉 단차의 효능이 잎차보다 우수하다고 인식했다. 이런 사실은 주권(朱權, 1378~1448)의 〈다보(茶譜)〉에서 확인된다.

〈물지〉에 이르길 좋은 차를 마시면 사람이 잠을 적게 하는데, 이는 차의 실체다. 다만 차가 좋으면, 바로 효과가 난다. (이는 단차류인)가루 차를 마실 때 드러나며 만약 잎차를 끓인다면 (차의)효과가 드러나지 않는다.(物志云 飮眞茶 令人少眠 此是實事 但茶佳乃效 且須末茶飮之 如葉烹者 不效也)

실제 주원장의 단차 금지령을 반포한 것은 대략 1391년경이다. 단차 금지령이 반포된 이후에도 차의 효능이 좋은 것은 단차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잎차를 선호하는 흐름에 따라 잎차의 제다법이 점차 개량되고 솥에서 직접 덖어내는 초청법(抄靑法)이 일반화되면서 우수한 잎차가 명차의 반열에 오르는 시대를 구가했다. 

출처: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6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