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유나 연구원
- 승인 2025.01.16 09:47
- 호수 1762
2. 당대 자다법(煮茶法)과 차도구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지금까지도 중국을 대표하는 명필인 왕희지의 글씨를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왕희지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난정서(蘭亭序)’를 변재화상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당 태종은 소익을 보내 이를 손에 넣고자 하였다. '소익잠난정도(蕭翼賺蘭亭圖)'는 당 태종의 명을 받은 소익이 왕희지의 '난정서'를 구하기 위해 변재화상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꾀어내고 있는 역사적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두 작품은 당대(唐代)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염립본(閻立本, 601~673)의 그림을 오대~송대 중에 모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단 그림은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이며, 하단 그림은 중국요녕성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염재화상과 소익이 아닌 그림 한 편에서 차를 준비 중인 두 사람의 모습이다. 모사된 작품인 만큼 후대 화가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부분이 존재할 가능성을 유념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자다법(煮茶法)과 그에 사용된 다구의 구성을 유추해 볼 좋은 자료가 된다. 당대의 다성(茶聖)으로 알려진 육우(陸羽, 733~804)는 '다경(茶經)'을 지어 그 시대 차의 제다와 탕법, 다구의 기준을 정립하였는데, 그가 '다경'에 기록한 자다법과 다구들을 '소익잠난정도'의 차 끓이는 장면과 비교해 보려한다.
자다법에서 차를 준비하는 순서대로 그림을 살펴보면, 노인이 차솥을 올려둔 풍로(風爐)가 보인다. 육우가 '다경'에서 풍로에 대해 묘사한 바와 같이 다리가 세 개 달린 모습이며, 그 아래로 잿가루를 받는 회승(灰承)이 깔려 있다. 하단 그림에는 풍로 옆에 차 끓일 물을 담아 둔 수반이 있다. 육우는 이를 수방(水方)이라 하여 목재를 짜 맞춰 만들도록 하였으나 그림 속의 것은 둥근 대야와 같은 모양이다. 그 안에는 국자(표, 瓢)가 걸쳐져 있고, 노인과 가까운 위치에 긴 젓가락 또는 집게처럼 보이는 도구가 놓여있다. 이는 풍로에 불을 뗄 때 부지깽이 역할을 하는 부젓가락(화협, 火筴)이거나 병차를 불에 구울 때 쓰는 집게(협, 夾)로 보인다.
상단 그림 속에는 다구들을 늘어놓은 평상 모양의 구열(具列)이 있고, 그 한쪽으로 연(碾)의 부속품인 굴대가 보인다. 둥근 바퀴 형태의 굴대는 중앙 양쪽으로 손잡이가 달려있는데, 굴대를 몸체의 긴 홈에 끼워 굴리면서 불에 구운 차병을 가루 낸다. 다시 하단의 그림으로 돌아오면 화로 옆으로 작은 수저가 걸쳐진 둥글고 나지막한 높이의 검은 그릇이 있고, 구열 앞쪽으로 비슷한 모양의 검은색 뚜껑이 있다. 이는 나합(羅合)일 것으로 생각된다. 나합은 얇고 고운 비단을 끼워서 연으로 분쇄한 찻가루를 정세하게 걸러내는 기구이다. 육우는 나합에 대해 ‘비단으로 체질하여 내린 가루를 뚜껑을 덮어 보관하며, 차 분말을 뜨는 수저인 칙(則)을 같이 넣어둔다... 혹 옻칠을 하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그림 속에 묘사된 모습과 제법 유사하다.
이제 화로에 올린 차솥을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노인을 주목해보자. 찻가루가 준비되면 차솥인 복(鍑)을 풍로에 올려 물을 끓인다. 차솥은 복 외에도 당(鐺), 요(銚) 등으로 불리는데, 손잡이의 위치나 모양, 주구(注口)의 유무 등 세부 형태에 따라 종류를 구분하지만 대체로 적당한 깊이감의 널찍한 소형 쟁개비를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자다법에는 왜 이렇게 생긴 차솥을 사용하였을까? 대체로 자다법이 아닌 점다법(點茶法)과 포다법(泡茶法) 등에서는 ‘물을 끓이는 도구’와 ‘차를 조리하는 도구’가 분리된다. 그러나 자다법에서는 그 두 가지 기능이 차솥 하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널찍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야 물이 끓는 것을 살피기에 쉬울 뿐더러 물이 끓으면 찻가루를 넣어 차 젓가락(죽협)으로 섞어가며 거품을 내기에도 좋다.
솥에 물을 끓이며 물고기 눈 같은 기포가 조금씩 보이면 소금으로 간을 하고, 솥 가장자리에 기포가 줄지어 오르면 물을 한 국자 떠낸 후, 물이 요동치며 끓어오를 때 찻가루를 넣는다. 그리고 가루가 고루 섞이도록 긴 젓가락(죽협, 竹筴)으로 휘저어 풍성한 차 거품을 낸다. 물을 끓일 때 소금을 넣은 것은 아직 제다의 과정에서 찻잎의 쓴 맛을 온전히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우는 차에 다른 재료를 섞는 것에 비판적이었으나, 차를 끓이는 데 필요한 다구의 종류에 소금통인 차궤(鹺簋)를 포함시킨 것으로 보아 소금의 역할을 중요시 한 것 같다.
그 다음 살펴볼 것은 차를 마심에 가장 중요한 다완(茶碗)이다. 두 그림 속에는 높은 흑칠 잔 받침의 백자 다완이 보이는데, 이는 당대가 아닌 후대의 조형과 구성에 가깝다는 논의가 일반적이다. 찻잔의 받침이 출현한 것은 대략 8세기 말로 육우가 '다경'을 저술한 시기와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육우는 차 도구의 구성에 잔 받침을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특히 이 시대의 다완은 나지막하고 널찍한 모양인데 잔을 받치는 부분이 그림처럼 높고 깊은 경우 다완의 밑 부분을 안정적으로 받칠 수 없어서 형태적으로도 부적절하다.
당대에는 월주(越州)의 청자와 형주(邢州)의 백자가 이름이 났지만, 육우는 새하얀 형주의 다완에 차를 담으면 차색이 붉게 보이기 때문에 차의 녹빛을 살려주는 월주의 청자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 차의 본연성을 가장 잘 살려줄 수 있는 소재의 선택과 더불어, 차를 마실 때에 입으로 뿐만이 아닌 눈으로 즐기는 운치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특히 이 시기의 다완은 기체가 낮고 구연까지 완만하게 넓어지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조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에는 차에 거품을 내서 마시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는데, 육우는 차 거품에 대해 차의 정영(精英)이 위로 뜬 것이라 보았다. 그는 거품의 크기나 두께, 밀도 등에 따라 말(沫), 발(餑), 화(華)라는 명칭을 붙여 분류할 만큼 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차 거품을 고르게 나누어 마실 수 있도록 국자로 다완에 옮겨 담을 때 유의하라고 강조했다. 즉, 이러한 형태는 차를 마실 때 다탕(茶湯)과 차 거품이 편히 머금어질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렇게 당대의 제다에 최적화된 다법과 이를 위해 고안된 차 도구들을 살펴보았다. 육우는 '다경'에서 찻자리의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전 과정에 소용되는 약 24가지의 기물들을 소개하였지만,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가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 점의 '소익잠난정도'안에서는 그 중 14가지 정도의 차 도구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제다와 다법, 차도구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어느 것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미숙한 제다를 다법을 통해 보완하고, 그 다법을 가장 잘 구현해 낼 수 있도록 그에 적합한 재질과 모양을 지니도록 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제다가 더욱 발전함에 따라 다법과 차 도구에는 또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다음 편에도 이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