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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송유나의 역사속 차 문화와 차 도구 이야기] 4. 명대 포다법(泡茶法)과 차도구

  • 관리자
  • 2025-02-24   조회수 : 39

4. 명대 포다법(泡茶法)과 차도구

  •  송유나 연구원
  •  
  •  승인 2025.02.24 12:49
  •  
  •  호수 1766
 

차의 본성 훼손·왜곡 않는 최고의 탕법 인식

찻잎 갈거나 뭉치지 않고 그대로 찌거나 덖은 산차 유행
차의 천연성 살리기 위해 겉치레·절차보다 본질에 집중

명 중기 문인화가 당인(唐寅)의 작품 ‘주팽다도(晝烹茶圖)’와 ‘금사도(琴士圖)’.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위 두 점의 그림은 명 중기 강남의 이름난 풍류문인이자 화가였던 당인(唐寅, 1470~1524)의 ‘주팽다도(畫烹茶圖)’(좌)와 ‘금사도(琴士圖)’(우)이다. 당인은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초년부터 뛰어난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경쟁이 치열한 남경(南京)의 향시(鄕試)를 수석으로 급제한 수재였다. 그런 그에게 북경(北京)의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탄탄대로를 걷는 것은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시를 보기 위해 상경한 당인은 시험과 관련한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누명을 쓰고 시험 자격이 박탈된 채 허망하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벼슬길이 좌절된 그는 고향인 소주(蘇州)를 중심으로 한 강남의 문인 사회에 의탁하여 그들과 교유하고 그의 재능을 살린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화풍과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여러 사람들의 취향과 주문에 맞춘 그림을 그리면서도, 문인으로서의 깊은 격조와 타고난 예술가적 면모를 결합시켜 일반 직업화가와는 차별화 되는 그만의 작품세계를 이루어 나갔다. 위의 두 그림은 모두 차를 끓이는 모습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명대에 차가 어떻게 향유되었는가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주팽다도는 부채에 그려진 그림으로, 소나무 아래 초가의 서실(書室) 속 선비는 찻잔과 다관(茶罐)이 놓인 책상 곁에 앉아서 창문 밖으로 시동이 화로에 탕관(湯罐)을 올려 찻물을 끓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원대 이후로 등장하여 명·청대 유행한 다화(茶畵)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속세를 떠나 자연에 은거(隱居)하는 문인의 고요한 정취를 담고 있다. 명 태조가 단차(團茶)의 조공을 폐지(1391)함과 맞물려 명·청대에는 찻잎을 갈거나 뭉치지 않고 잎을 그대로 찌거나 덖는 방식으로 제다한 산차(散茶)가 유행하였다. 산차와 짝을 이루는 탕법(湯法)은 포다법(泡茶法)으로, 포다법은 자다법이나 점다법에 비하여 절차가 간소하기 때문에 다화에 묘사되는 모습도 비교적 간결하고 소박하게 묘사된다.

그럼에도 당인의 작품 중 금사도는 포다법의 준비 과정과 그에 소용된 기물 구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인이 당시 거문고를 잘 타는 것으로 유명했던 양계정을 위해 그린 것이다. (위의 이미지에서는 생략된) 그림의 전체 폭 한쪽에는 주위에 진귀한 고동기(古銅器)와 서책, 찻잔과 다관을 늘어두고 거문고를 타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 반대편으로는 위의 우측 이미지에서 보이듯 서책과 문방구, 고동기물이 놓인 사각의 탁자 옆으로 찻물을 끓이고 있는 시동이 있다. 명대의 문인들은 아회(雅會)라고 하는 모임을 열어 고동기물을 완상하고 음악을 감상하고, 시·서·화를 써서 교류하는 아취와 풍류를 즐겼다. 이 그림은 그러한 당시의 강남 문인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 그림을 통하여 그러한 모임에 차를 마시는 일이 포함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청대에 유행한 포다법은 화로 위에 탕관을 올린 후, 물이 끓으면 다관에 찻잎(산차)을 넣은 후 끓인 물을 부어서 우러난 차를 찻잔에 따라 마시는 방식이다. 포다법은 당·송대 유행한 자다법이나 점다법에 비하면 절차가 단순하지만, 명·청대 사람들은 이것이 오히려 차의 본성을 훼손하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최고의 탕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명대 사람들의 인식은 장대복(張大復, 1554~1630년)의 ‘매화초당필담(梅花草堂筆談)’, 진계유(陳繼儒, 1558~1639년) ‘다동소서(茶董小序)’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장대복은 “오늘날(명대)의 차는 당·송대와 차를 숭상하는 바가 다르며, 차를 내는 탕법이 다르다. 간편하지만 특별하여 천연스러운 자태를 모두 갖추었으니 차의 진미(眞味)가 극에 달했다고 할만하다”라고 하였다. 진계유 또한 “좋은 차를 겨루기 위해서는 차의 천연스러운 색과 향이 영롱하게 피어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에 준하여 차를 다룬다면 육우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훼다론(毁茶論)’을 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전대의 탕법이 차의 본질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화려했음을 은연히 비판하였다 육우는 이계경이 겉치레에 현혹되어 그를 무시하자 『훼다론(毁茶論)』을 지어 차를 대하는 잘못된 태도를 비판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처럼 사치스러운 겉치레나 절차 보다 차의 천연성을 살리기 위한 본질에 집중한 명대의 포다법은 간소하지만 차를 내는 모든 과정과 조건이 최선의 조화를 이루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 기본은 불(화후, 火候), 물(탕변, 湯辨), 차(투다, 投茶), 다구(茶具)에 있는데, 장원(張源)의 ‘다록(茶錄)’이나 전예형(田藝蘅)의 ‘자천소품(煮泉小品)’을 비롯한 명·청대의 수많은 다서와 기록들에 이에 대한 내용들이 남아있다. 

우선 ‘화후’란 불을 살피는 것이다. 위의 두 그림을 보면 다동이 화로 앞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금사도>를 보면 삼족의 화로 곁으로 숯을 담은 바구니와 찻물로 쓸 물을 담아 국자를 걸쳐 둔 커다란 호(壺)가 있고, 앞쪽으로는 부지깽이로 사용한 부젓가락한 쌍이 놓여있다. 화로에 숯을 넣고 통홍(通紅)으로 숯불이 빨갛게 올라오면 탕관에 끓일 물을 담아 화로에 얹고 부채를 부쳐서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불의 세기는 지나쳐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그 적정선을 잘 살펴가며 부채질을 해야 한다. 

화후와 연결되는 ‘수변’은 끓는 물의 적정 온도를 분별하는 것이다. 포다법에서는 차를 우리기 위한 적당한 온도의 물을 얻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끓는 물의) ‘형태’, ‘소리’, ‘수증기’로 최적의 온도를 구분하였다. 당시 물을 끓이는 도구로는 주전자 형태의 탕관이나 요(銚)라고도 불리는 쟁개비 형태의 손잡이 달린 작은 솥(鼎) 등이 있었다. 솥이나 요는 구연이 냄비처럼 널찍하여 물이 끓는 모양새를 살피기에 편리하다. 주전자 형태의 탕관은 구연이 좁아서 물이 끓는 내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온도를 유지하기에 좋으며, 소리와 수증기로 수변을 가늠할 수 있었다. 

‘투다’란 차를 우릴 다관에 찻잎을 넣는 순서를 말한다. 그 순서는 하투(下投), 중투(中投), 상투(上投)로 나뉘는데 기후나 계절, 차의 특성에 따라 다관에 찻잎을 먼저 넣을 것인지 끓인 물을 먼저 넣을 것인지 등을 세심히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찻잎을 우려내는 다관도 무척 중요한 다구 중 하나였는데, 명·청대에는 강소성 의흥(宜興) 지방의 자사(紫砂)로 제작한 자사호가 큰 인기를 끌었다. 자사 특유의 원료적 특성으로 인하여 자사호는 차가 쉽게 식지 않으면서도 차의 신선도를 유지해 주어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부드러운 점토질을 띠기 때문에 성형이 용이하여 차를 애호한 문인들의 취향을 반영한 작품 또한 많이 탄생하였다. 완성된 차를 마시는 찻잔으로 맑은 차색이 돋보일 수 있는 백자잔이 선호되었는데, 그림 속에도 자사다관과 백자잔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명·청대에 유행한 산차와 포다법은 강남의 문인 문화를 중심으로 향유되었고, 그들은 사치하지 않으면서도 고아하고 섬세한 차의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문인들은 그들이 탐미한 차에 대하여 시(茶時), 서(多書), 화(茶畵)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와 주제로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들에 남아있는 차의 본질과 차와 다구를 다루는 올바른 태도, 그들이 차를 즐겼던 방식 등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중요하고 유효한 것들이므로 앞으로의 연재에서 차근차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송유나 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clda0cho@gmail.com

 

 


  육우는 이계경이 겉치레에 현혹되어 그를 무시하자 『훼다론(毁茶論)』을 지어 차를 대하는 잘못된 태도를 비판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