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유나
- 승인 2025.04.18 13:27
- 호수 1774
지난번에는 물을 끓이는 다구의 소재와 탕법에 따른 적절한 형태에 관해 확인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토록 섬세하게 선별되고 고안된 다구를 가지고 옛사람들은 어떤 방법과 기준으로 물을 끓였을까? 이번 편에서는 그들이 생각한 좋은 탕수(湯水, 끓인 물)란 무엇이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그림은 명대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다구십영도(茶具十咏圖)>이다. 문징명은 문인화를 대표하는 남종화(南宗畵) 계통의 맥을 잇는 명대 오파(吳派)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시·서·화에 뛰어났던 그는 심주(沈周), 당인(唐寅), 구영(仇英)과 함께 명사대가(明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데, 차는 강남 문인 문화를 이끌었던 이들의 고아한 취향에 어울리는 기호품이었다. 그래서인지 명사대가들은 모두 차와 관계된 그림을 많이 남겼고, 그 안에서 당시 문인들이 향유한 차 문화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다.
찻자리를 묘사한 수많은 그림 중에서 수묵으로 표현된 적막한 느낌의 이 그림을 고른 것은 속세와 동떨어진 채 시간마저 멈춘 듯 심원하고 정결한 다사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깊고 높은 산중 커다란 소나무가 흐드러진 사이로 초가 속 선비가 고요하게 앉아 다관(茶罐)과 찻잔을 앞에 두고 시동이 찻물을 끓여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부엌에서 탕관을 얹어둔 화로 앞에 앉은 시동은 커다란 부채를 부치면서 물을 끓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는 아주 섬세하고 신중하게 탕관 속 찻물의 온도를 살피는 중일 것이다.
옛사람들은 좋은 차를 마시기 위하여 차를 준비하는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요소와 조건을 정밀하고 세심하게 준비하였다. 따라서 탕관에 물을 끓이는 온도도 눈에 보이는 물의 모양이나 소리, 수증기의 형태 등으로 예민하게 가늠하였다. 특히 당대의 자다법(煮茶法)에서부터 명대의 포다법(泡茶法)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두루 사용되었던 당(鐺)이나 요(銚), 복(鍑) 등은 냄비처럼 구연이 널찍한 쟁개비 종류이기 때문에 물이 끓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살필 수 있었다.
당대 육우(陸羽)는 ‘다경(茶經)’에서 복 안의 물이 끓는 단계의 모습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물이 끓는 것이 물고기 눈[어목, 魚目]과 같으면서 미미한 소리가 나면 1비이고, 복의 가장자리로 구슬이 줄지어 솟아오르면(연주, 連珠) 2비이다. 물결이 널뛰듯 고동치며 파도가 일면(등파고랑, 騰波鼓浪) 3비이다. 그 이상은 노수(老水)라서 마실 수 없다.’ 여기에서 1, 2, 3비(沸)란 온도에 따른 끓는 물의 단계로 이해하면 되는데, 노수가 된다는 것은 물이 지나치게 끓어서 찻물로 쓸 수 없는 물을 의미한다. 차를 달임에 물의 온도를 중요시했던 과거에는 물이 덜 끓은 것도, 넘치게 끓은 것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송대에 주로 쓰인 탕병(湯甁)이나 명대에 사용된 탕관(湯罐)은 주전자 형태를 띤다. 이것들은 구연이 크지 않고 뚜껑이 있기 때문에 물이 끓는 속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어서 소리와 수증기의 모양으로 물의 온도를 짐작해야만 했다. 송대 나대경(羅大經, 1196~1252년)은 ‘학림옥로(鹤林玉露)’에서 시구를 인용하여 소리로써 온도를 분별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섬돌에 귀뚜라미가 쓰륵쓰륵 우니, 모든 매미를 재촉하는구나. 갑자기 수천의 수레가 덜컹거리며 올라오다가, 송풍(松風)과 산골 물소리 들리면, 급히 푸른 옥색의 잔을 찾는다”라고 하였으니, 귀뚜라미 소리, 매미 소리, 수레 구르는 소리, 소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산골 물 흐르는 소리의 순서로 물이 끓는 단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명대 장원(張源)은 ‘다록(茶錄)’에서 수증기로 물 끓는 온도를 분별하는 방법을 기록하였는데, “수증기가 처음에는 한 가닥, 두 가닥, 세 가닥 뜨다가 어지러운 가닥이 마구 뒤섞여 나눌 수가 없을 만큼이 되고, 이후 곧바로 수증기가 곧게 뚫듯이 솟는데 이때가 적당한 때”라고 하였다.
이렇게 물이 끓는 단계를 다양한 방법과 기준으로 세분화하였지만, 시대와 탕법에 따라 선호되는 물의 온도는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송대부터 명·청대까지는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찻물이 제대로 끓었음을 알려주는 징후로 삼았다. 그러므로 ‘송풍’이란 단어는 수많은 다시(茶詩)에서 중요한 시어로서 자주 등장한다. 위의 그림을 비롯한 여러 다화(茶畵) 속에 소나무 아래에서 찻물을 끓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찻물이 끓는 소리와 그 과정의 운치를 강조하려는 의도다. 이것을 알고 보면 고요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그림 속의 소나무와 시동이 열심히 살피고 있는 작은 탕관으로부터 시원한 솔바람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좋은 물을 구하여 불기운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잘 만든 화로에서 활화(活火)로 끓인 탕관에 솔바람 소리가 나면, 이제 주인공인 차가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차를 저장하고, 가공하는 도구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송유나 clda0cho@gmail.com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8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