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명대의 유명 문인 화가였던 문징명(文徵明, 1470~1559년)의 ‘품다도’(品茶圖)이다. 문징명은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심주(沈周), 당인(唐寅), 구영(仇英)과 함께 명사대가(明四大家)로 불리며, 오파(吳派)라고 하는 명대 문인화의 주요 화파를 형성하였다. 오파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소주(蘇州)의 오(吳)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이다. 당시 소주 지역에서는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여유롭고 풍요로운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문징명과 동시기를 살아간 여러 문인들은 시(詩), 서(書), 화(畵)를 통해 서로 교유하고, 때로는 그 재능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강남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런 흐름을 주도한 문징명과 그의 동료들은 뛰어난 문재(文材)였지만,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며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예술 세계를 갈고 닦을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며 차는 그들에게 위안과 벗이 되어주었다.
명대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점다법(點茶法) 대신, 문인 취향의 간결하고 담박한 포다법(泡茶法)이 유행하였다. 간소화된 제다(製茶)와 탕법(湯法)은 오히려 차 본연의 진수를 드러내는 방법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차 향유자들의 차에 대한 감상은 시, 서, 화를 매개로 다양하게 표현되었으며 문인 문화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문징명과 그의 동료들도 그러한 측면에서 차를 애호하였으며, 그를 비롯한 명사대가, 오파 화가들은 차에 대한 그림을 여럿 남겼는데, ‘품다도’ 역시 그중 한 예이다. 화폭 위쪽에 문징명이 그림에 대해 남긴 글귀[화제, 畵題]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碧山深處絕纖埃 面面軒窗對水開
榖雨乍過茶事好 鼎湯初沸有朋來
嘉靖辛卯(西元一五三一年) 山中茶事方盛 陸子傳過訪
遂汲泉煮而品之 真一段佳話也 徵明製
푸른 산 깊은 곳엔 작은 티끌조차 끊어졌는데, 모든 창문은 물가를 향해 열렸네.
곡우가 막 지나니 차 만들기에 좋고, 솥의 찻물이 막 끓기 시작하자 벗이 오누나.
가정(嘉靖) 신묘년(1531년), 산 중에 차를 만드는 일이 바빠지자 육자[陸治]가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전하네. 마침내 샘물을 길어다가 차를 품평하니, 참으로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라.
이 글귀는 그림 속 장면과 그 배경을 묘사했다. 속세와 분리된 맑고 고요한 깊은 산 속에 초가가 하나 있다. 냇물이 집 주변을 둘러 흐르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담아낼 수 있도록 넓게 트인 집의 문과 창문은 밖을 향하여 활짝 열려있다. 부엌에서는 시동이 찻물을 끓이고, 안채에서는 문징명 자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손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인물이 마주 앉은 책상 위로는 서책과 함께 다관(茶罐), 찻잔이 놓여있다. 만물을 촉촉하게 적셔 곡물이 자라도록 하는 봄비가 내리는 절기에는 좋은 차가 만들어지니, 문징명이 벗들을 불러 찻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찻물을 끓이는 소리가 들리고 때마침 또 다른 벗이 냇가의 다리를 건너 찾아오고 있다. 이 찻 자리에 마실 차를 가져온 이는 육자라는 인물로, 문징명에게 그림을 배운 제자 육치(陸治, 1496~1576년)이다. 그들은 좋은 차가 나오는 때에 차를 구해 좋은 물로 끓여 나누어 마시며 차에 대해 품평하고 담소를 나누었는데, 바로 그 자리의 모습과 풍취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차를 품평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좋은 차와 좋은 물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잘 보관하지 못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달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차나 물을 담는 저장 용기부터 화로와 탕관(湯罐) 등의 여러 다구가 필요한데, 이번 글에서 다룰 다구는 끓인 물(탕수, 湯水)을 담아 찻잎을 넣고 차를 우리는 다관(茶罐)이다. 찻잎을 우려내는 탕수는 차의 색(色)·향(香)·기(氣)·미(味)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다. 그렇기에 그 바탕의 장(場)이 되는 다관의 역할은 단연 중요하다.
명·청대에는 의흥(宜興) 지방에서 나오는 자사호(紫砂壺)가 좋은 다관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자사호의 재료가 되는 자사(紫砂)는 색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지만 대체로 붉은 갈색을 띠는 니질(泥質)의 광물이다. 보온성과 통기성이 좋아 찻물이 쉽게 식지 않으며 잡내를 빼주어 차 맛을 돋워준다. 미세한 입자는 곱고 부드러워 형태를 만들기에 좋다. ‘품다도’에 그려진 둥근 배의 커다란 갈색 다관도 바로 자사호이다. 자사호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대개 ‘품다도’에서처럼 단형한 형태로 크게 만들어졌지만, 청대로 갈수록 사람들이 크기가 작은 것을 선호하여 1인당 1개의 호를 놓고 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하였으며, 형태도 더욱 섬세하고 화려한 것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명·청대의 사람들은 단순히 다관에 찻잎을 넣는 행위조차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이 차 맛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분석하였다. 명대 장원(張源)의 ‘다록’(茶錄)에는 다관에 찻잎을 넣는 방법[투다, 投茶]이 담겨 있다. “다관에 찻잎을 넣는 것에는 차례가 있는데, 그 마땅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찻잎을 먼저 넣고 난 후에 끓인 물을 붓는 것을 ‘하투(下投)’라 하고, 끓인 물을 반쯤 넣고 찻잎을 넣은 다음 다시 끓인 물을 부어 다관을 가득 채우는 것을 ‘중투(中投)’라 한다. 끓인 물을 먼저 넣고 난 후에 찻잎 넣는 것을 ‘상투(上投)’라고 한다. 여름에는 상투가 마땅하고, 겨울에는 하투가 마땅하다. 봄과 가을에는 중투가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중국 강남 지역의 고온 다습한 기후와 계절에 맞춘 방식으로 우리 땅의 환경과 계절에 맞는 투다 방식이 필요하며, 대개 하투가 적당하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차를 우릴 때 차를 내는 과정의 순서나 사용되는 다구의 재질에 따라 차 맛이 좌우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송유나 clda0cho@gmail.com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