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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송유나의 역사 속 차 문화와 차 도구 이야기] 16. 가장 귀한 차를 담았던 찻그릇에 대하여 - 건요(建窯) 흑유잔(黑釉盞)

  • 관리자
  • 2025-09-12   조회수 : 7

16. 가장 귀한 차를 담았던 찻그릇에 대하여 - 건요(建窯) 흑유잔(黑釉盞)

  •  송유나
  •  
  •  승인 2025.08.29 13:25
  •  
  •  호수 1791
 

두터운 유약층·감흑색으로 송대 풍미한 찻그릇

흑유잔, 하얀 거품 관찰 용이…최고의 차품 다루는 투다에 제격
단차 즐기고 감상하는데 최적…아름답고 실용적인 기능성 찻잔
점다법 사용하기 쉽도록 형태 계량…남송 대 일본 전해져 열풍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흑유잔. 건요 흑유잔은 잔이 두툼하고 열감이 오래가 사랑받았다.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흑유잔. 건요 흑유잔은 잔이 두툼하고 열감이 오래가 사랑받았다.

다구(茶具)를 생각할 때 대부분 가장 먼저 찻그릇을 떠올릴 것이다.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수많은 과정과 여러 도구가 필요하지만, 결국 다사(茶事)의 화룡점정은 찻그릇으로 이루어진다. 찻그릇은 시대에 따라, 차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이 차를 즐기고 감상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할 찻그릇은 송대 유행한 건요(建窯)의 흑유잔(黑釉盞)이다.

11세기 중반 송대 고급 명차의 상징인 소용봉단(小龍鳳團)을 개발한 채양(蔡襄)은 ‘다록(茶錄)’에서 “차색은 하얗기 때문에 검은 잔이 마땅하다. 건안에서 만든 것은 감흑색이 도는데, 토끼털 같은 문양이 있다. 잔이 약간 두툼하여 데워지면 열감이 오래가서 쉽게 식지 않아 쓰기에 가장 좋다. 다른 데에서 생산된 것은 (기벽이) 얇거나 자색이 돌아서 모두 (건안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 투다하는 사람들은 청백잔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건요의 흑유잔이 심미성과 기능성 모두를 갖추고 있기에 고급 차를 담는 데 적합하며, 좋은 차의 품등을 겨루는 투다를 할 때에도 반드시 사용되었음을 언급한 것이다.

위의 작품은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흑유잔이다. 채양이 묘사한 것처럼 감흑색을 띠고 있다. 구연 주변으로는 토끼털처럼 가느다란 갈색의 선문(線文)이 보이는데,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흑유잔을 토호잔(兎毫盞)이라고도 한다. 그릇의 하단을 보면 검은 유약이 아주 두텁게 내려와 있다. 이렇게 두텁게 발린 유약층이 잔 내부의 온기를 오래 유지해 주면서도 손으로 잡았을 때 뜨겁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잔의 구연 바로 아래에 미세하게 움푹 들어간 부분이 보인다. 이것을 속구(束口)라고 하는데, 이런 잔의 형태는 당시에 유행한 탕법(湯法)과도 관련이 있다.

송대 유행한 탕법인 점다법(點茶法)에서는 단차(團茶)를 곱게 가루 내어 찻잔에 넣고 끓인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수저(다시, 茶匙)나 대나무 솔(다선, 茶筅)로 세차게 휘젓는다. 이 과정을 격불(擊拂)이라고 하는데, 찻가루와 탕수가 섞이며 뽀얀 차 거품이 만들어진다. 흑유잔의 구연 근처에 있는, 움푹 파인 속구는 격불할 때 휘젓기 편하면서도 찻물이 넘치지 않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격불을 통해 만들어진 차 거품이 풍성하고 조밀하여 쉽게 꺼지거나 흩어지지 않을수록 좋은 차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투다를 할 때에는 차 거품이 얼마나 잘 피어나고 오래 유지되는지로 승패를 판단하였다. 송대에는 차의 부드럽고 여린 맛을 선호하여 제다(製茶) 과정에서 엽록소를 제거해 쓴맛을 없앴다. 그래서 차색이 하얗다는 것은 그만큼 정세한 공정을 거친 고급 차임을 의미했다. 흑유잔의 어두운 색상은 새하얗게 피어난 차 거품과 대비를 이루며 차색을 돋보이게 하였을 뿐 아니라 투다를 할 때 차 거품의 모습을 관찰하기에도 용이했다.
이 같은 투다 과정을 잘 묘사한 시가 있다. 송대 범중엄(范仲淹, 989~1052년)과 장민(章岷)이라는 인물이 투다를 하고 나서 장민이 투다시를 지었는데, 이에 범중엄이 답가를 쓴 것이다. 비교적 긴 분량의 시인데 투다에 대해 잘 묘사한 부분만 발췌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앞부분 생략)
北苑將期獻天子 林下雄豪先鬪美 
鼎磨雲外首山銅 甁携江上中泠水 
黃金碾畔綠塵飛 紫玉甌心雪濤起
鬪茶味兮輕醍醐 鬪茶香兮薄蘭芷 
其間品第胡能欺 十目視而十手指
勝若登仙不可攀 輸同降將無窮耻 
(뒷부분 생략)

북원에서 장차 천자에게 올릴 차이거늘
산림의 은둔 호걸들이 먼저 (북원 차의) 풍미를 겨룬다네.
차솥은 구름 위로 높이 솟은 수산(首山)의 동으로 만들었고
병에는 중령천(中泠水)에서 떠온 물을 담아왔다네.
황금으로 만든 다연(茶碾)의 언저리로 푸른 티끌 흩날리고
자줏빛 잔 속에는 흰 눈 같은 파도가 일렁인다.
차맛을 겨루니 제호(醍醐)가 우습고
차향을 겨루니 난초와 지초 향은 그저 엷디엷구나.
차를 품제함에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겠는가
이토록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거늘.
이기면 신선이 되어 올라 끌어내릴 수가 없고
(차 거품이) 깨지면 항복한 장수와 같으니 끝없이 부끄럽도다.

이 시의 생략된 앞부분은 황제에게 진상할 차를 생산하는 북원(北苑)에서 얼마나 귀한 차를 공들여 만들었는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범중엄이 투다를 위해 황제에게 올리는 귀한 차와 엄선된 재료로 만든 차솥, 황금 다연(茶碾), 그리고 당나라 때부터 명천으로 자자한 중령(中泠)의 물을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고의 차품을 겨루기 위해 차와 물, 차 도구까지 귀한 것으로만 준비하였는데, 여기에서 사용한 자옥구(紫玉甌)는 흑유잔이다. 또한 그는 투다한 차의 맛과 향을 제호(醍醐)와 난초, 지초향에 빗대었다. 제호란 ‘우유를 숙성시켜 만든 유제품의 일종’으로 ‘최고의 진미(眞味)’를 상징하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단어이다. 난초와 지초는 ‘아주 향기롭고 좋은 향’을 비유할 때 사용되는 표현으로, 차의 좋은 향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한다. 세상 그 어떤 진미와 좋은 향에 비교해도 자신이 투다한 차의 맛과 향이 훨씬 뛰어남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투다 과정을 여러 사람이 함께 지켜보았는데, 격불한 차 거품이 쉽게 깨져 사라지면 투다에 패배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서인 ‘대관다론(大觀茶論)’을 직접 저술할 정도로 차에 조예가 깊었던 북송의 황제 휘종 역시 흑유잔을 가장 좋은 찻잔으로 꼽았으며, 남송대에는 승려들을 통해 일본으로도 전해져 열풍을 이어갔다.

송대의 흑유잔은 고급의 단차를 즐기고 감상하기에 최적의 기능성을 갖춘 찻그릇이었다. 흑유잔이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황실을 비롯한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한 점다법과 긴밀하게 짝을 이루며 사용에 용이하도록 형태가 개량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심미안에 부합하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유나 clda0cho@gmail.com

출처 :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0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