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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한국 다도의 원류를 찾아 <1> 차문화의 맹아기

  • 관리자
  • 2025-09-12   조회수 : 11

한국 다도의 원류를 찾아 <1> 차문화의 맹아기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25.09.12 09:10

“여러 날 못 먹어도 견디지만 하루도 차 없으면 안 된다”

차 나무에 돋은 차싹,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를 따는 시기, 찻 잎의 크기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생기가 충만한 차잎들.
차 나무에 돋은 차싹,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를 따는 시기, 찻 잎의 크기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생기가 충만한 차잎들.

찻잎으로 차 만드는 탕법과 
제다법이 보편화 된 토대는
육유 교연 깊이 교유하면서
선종의 차문화와 깊이 습윤

파촉 지역에서 발원한 차 문화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면서 문화의 결을 만들어냈다. 8세기 저술된 육우(733~804)의 <다경>에는 “차를 마시게 된 것은 신농씨(神農氏)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신농씨는 상고시대 전설적인 인물 염제를 말한다. 그가 약초를 실험하던 중 중독되어 어려움을 겪을 때 이를 치료한 것이 차라고 전해진 신화의 상징적 의미는 확실하다. 바로 불평한 심신 상태를 조절, 정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이 차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고문헌에 나타난 차의 기록은 <안자춘추>에 “안영이 제 나라 경공의 재상으로 있을 때 거친 밥과 세 꼬치의 구운 고기, 계란 5개, 차 나물을 먹었을 뿐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보다 앞선 시기인 선사시대에도 차를 식재료로 활용했을 가능성은 연 것은 1974년경 저장성(浙江省) 여요(余姚)의 하모도(河姆渡) 유적의 발굴이다. 바로 부엌으로 추정되는 구역 내에서 차 나무뿌리가 발굴되었다는 점에 그렇다.

한편 1972년 발굴된 장사 마왕퇴 서한 2.3호 묘에서 ‘고사(木古月)’라고 쓴 목패(木牌)의 출토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2세기 경 서한의 귀족 묘에 차를 부장했다는 점을 드러낸 고고학의 발굴이었다. 하지만 위진 남북조 시대까지도 차는 남방의 문화였기에 북방까지 확산되지 않았다.

수나라가 대운하를 개통한 후 멸망했지만, 이를 통해 남북의 물류 교류가 원활해지는 발판이 되었다. 특히 당나라의 건국이 후 대운하를 통한 유통망의 확충 및 상업의 발달은 국력의 신장뿐 아니라 풍요로운 경제 발전을 이룩한 동력이 되었다. 차 또한 북방까지 유행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점차 중국인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물품으로 자리 잡았으니 대략 이 시기는 9세기 무렵이다. 이런 정황은 양화(楊華)의 <선부경수록(膳夫經手錄)>에 “지금 관서(關西)와 산동(山東) 지역에는 여염 촌락에서도 모두 차를 마신다. 여러 날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견딜 수 있지만 하루라도 차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중국 서한 시대 마왕퇴 2.3화 묘에서 발굴된 물목표, 고사는 차를 담은 광주리를 의미한다
중국 서한 시대 마왕퇴 2.3화 묘에서 발굴된 물목표, 고사는 차를 담은 광주리를 의미한다

남선종 수행과 차 융합된 후 
정신 음료로 자리를 매김 해
좌선에 장애되는 ‘수마’ 해결
달마 눈썹이 차나무 된 전설

그렇다면 중국의 차 문화가 남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일까. 바로 육우(陸羽 733~804)의 제다법과 탕법을 체계화하여 차 싹으로 만든 순수한 차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완성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그가 찻잎으로만 차를 만드는 제다법과 탕법을 보편화할 수 있었던 토대는 안록산의 난을 피해 호주로 내려갔을 때 교연(皎然)과 깊이 교유하면서 수행과 융합된 선종의 차 문화를 깊이 습윤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제다법과 탕법을 체계화하기 이전에는 차와 쌀죽, 파, 생강 등을 함께 넣어 끓여 마시는 잡차(雜茶)였다. 그러므로 육우의 제다법과 탕법이 얼마나 획기적으로 발전된 유형인지는 3세기 문헌인 <광아(廣雅)>의 제다법과 탕법을 비교해 보면 드러낸다.

형주와 파주에서는 찻잎을 따서 덩이차(餠茶)로 만든다. 쇤 잎으로 만든 차는 덩이차(병차,餠茶)를 만들어 쌀죽에 넣었다가 꺼낸다. 차를 마시려면 먼저 (차를) 빨갛게 굽는다. 찧은 (차)가루를 그릇에 넣고, 끓은 물을 부어 (그릇의)뚜껑을 덮는다. 파, 생강, 귤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차를 마시면 술이 깨고, 잠이 적어진다.

<광아>는 3세기 무렵 제다법과 탕법을 엿볼 수 있는 고문헌이다. 위(魏)나라 장집(張楫)이 편찬한 사전류로, <이아>의 목차와 체재를 따라 편찬하였다. 이 문헌에 언급된 제다와 탕법은 삼국시대로부터 초당(初唐) 시기, 즉 8세기 육우가 제다법을 완성하기 이전에 남방 지역에서 유행했던 방법이다. 당시 덩이차(餠茶)는 시루에서 차 싹을 쪄내는 증제법(蒸製法)으로, 쓰고 떫은 맛(苦澁味)을 줄여서 달고 윤택한 맛을 내기 위한 방법으로 쌀죽을 활용한 셈이다. 다른 한편으론 파나 생강, 귤 등을 차와 함께 끓여 차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비록 당시 제다와 탕법은 미흡했지만, 술을 깨게 하고, 잠을 적게 하기 위해 차를 마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의 효능을 적극적으로 양생에 활용한 것은 도가이다. 몸과 마음을 맑고 가볍게 해주는 차의 실익을 활용한 사례는 호거사(壺居士)의 <식기(食忌)>에 “쓴 차를 오래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광동 강서지역 차 문화 발원지
‘선 수행 차 융합’ 영향 가능성
구법승 의해 신라에 차 들어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 사용

한편 남선종의 수행과 차가 융합된 후 차는 정신 음료로 명실상부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남선종의 수행 전통은 남선종의 초조 달마대사의 좌선 수행법의 장애요소였던 수마(睡魔)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는 달마선사가 좌선 수행 중 쏟아지는 졸음을 없애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 던진 것이 차 나무가 되었다는 설의 생성은 머리를 맑게 하고, 몸을 정화하는 차의 효능을 수행에 적극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혜능선사(638~713)의 제자들이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전통은 백장선사(720~814)가 <청규>를 만들면서 승단의 생활 규범이 구체화되면서부터다. 이들이 수행 근거지로 삼았던 광동과 강서지역은 차 문화의 발원지로 수행 중 차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지역적인 특성도 선 수행과 차의 융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신라에 처음으로 차가 들어 온 것은 7세기 전후 도당구법승(渡唐求法僧)에 의해서다. 대개 새로운 선종의 수행법을 구하고자 당나라로 유학했던 신라 구법승들은 대개 강서지역에 모여들었고, 교학에 뜻을 두었던 승려들은 장안으로 모였다. 하지만 7세기전후에 귀국한 남선종의 구법승은 교종의 득세로 크게 그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이 들여온 차는 널리 확산되지 못한 채, 겨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로 사용하는데 그쳤는데, 당시 차의 종류는 당나라에서 유행했던 완품의 덩이차(병차)와 월주요 청자 찻잔이었다. 실제 신라 왕실과 사원으로 차가 퍼진 것은 대략 9세기경인데, 이는 9세기 회당사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불교신문 3888호/2025년9월16일자]

출처: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305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