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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한국 다도의 원류를 찾아 <2> 차 문화 꽃 피운 ‘고려’

  • 관리자
  • 2025-09-22   조회수 : 31

한국 다도의 원류를 찾아 <2>차 문화 꽃 피운 ‘고려’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25.09.22 05:39

“대렴이 가져온 차 씨 지리산에 심으라고 명했다”

남송 주계상의 ‘오백나한도’ 세부도.
남송 주계상의 ‘오백나한도’ 세부도.

차문화 확대 나말려초 

구산선문 개창과 밀접

구법승 차 융합에 영향

<삼국사기>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귀국하면서 차 씨를 가져왔다. 왕께서 지리산에 심으라고 명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9세기 무렵 차 수요의 확충에 따른 자급자족이 필요해졌던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흥덕왕(재위기간, 777~836)이 회당사(回唐使) 대렴이 가져 온 차 씨를 지리산에 심게 한 것은 이미 신라 사회에 차에 밝은 계층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편 차 문화의 유입 초기 당나라에서 만든 덩이차[餠茶]와 찻잔을 가져왔던 때보다 2세기가 경과한 후엔 한층 발전된 음다 흐름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도당구법승(渡唐求法僧)은 새로운 남선종의 수행법과 함께 차를 마시며 수행하던 일상에 익숙했고 당의 선진문물을 수용했던 지식인이다. 그러므로 신라 왕실에서는 이들이 귀국할 때 왕이 몸소 신하를 거느리고 나아가 영접하는 등 융숭하게 대접했는데, 이는 신라 왕실이 도당구법승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당으로 도당구법승과 유학생의 파견은 당의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하려는 신라 왕실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결국 신라 왕실은 선진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나라 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했다는 점에서 당으로 인재를 파견한 일은 고도화된 국가 전략 중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전반으로 차 문화의 확대는 나말려초(羅末麗初) 구산선문의 개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선문의 개창은 불교계가 사회, 정치, 문화, 경제에 미친 영향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구법승은 신라 말 호족에게 종교, 사상적으로 깊은 신뢰를 구축하면서 호족의 정신적인 지주로 부상되었다. 그러므로 구법승의 수행과 융합된 차 문화는 호족뿐 아니라 왕실 귀족층과 관료 문인들이 차를 즐기는 풍조를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의 건국은 불교계의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로 인해 음다층을 넓힐 수 있는 토양을 만들 수 있는 시대 환경을 만난 것이라 하겠다. 이는 사원의 수행승들이 왕실 귀족층과 함께 난만한 차 문화를 만들어 낸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과적으로 고려 시대의 차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첫째 당시 차 문화를 이끌었던 왕실 귀족, 수행승, 관료 문인들의 차의 애호와 고상한 안목에 걸맞은 고급차와 다구가 생산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이들의 안목에 부응할 수 있는 차를 생산할 기반이 든든하여 좋은 차와 다구를 완성하여 고려적인 특색을 지닌 차 문화를 구가했던 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11~12세기는 가장 발전된 차 문화를 구가했던 시기인데, 당시 고려의 풍토와 고려인의 기호를 반영한 고려만의 특징을 드러낸 문화를 향유했다. 더구나 이 시기 차 문화를 이끌었던 귀족층과 수행승들은 새로운 음다의 흐름에도 민감하여 송나라의 새로운 제다법을 적극 받아들여 동시대의 음다 흐름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실이 주관한 공덕재에서 왕이 친히 차를 갈아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며, 승원에서는 명전을 주관하거나 관료 문인들과의 교류는 고상하고도 깊이 있는 문화의 결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아울러 고려 시대의 차 문화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차와 창자 다구 등을 완성하였다. 특히 고려다운 문화 결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왕실 귀족과 수행승, 문인들의 안목은 주효했으며 왕실과 사원의 풍요로운 경제력도 차 문화를 발전시킨 연유였다.

고려시대 단차를 만들때 여린 차싹으로 차를 만들었다.
고려시대 단차를 만들때 여린 차싹으로 차를 만들었다.

차 하사하여 장수 기원 

임금의 덕치 실현 ‘수단’

공납한 백성들은 ‘고통’

특별히 주목할 점은 고려 왕실에서 심신을 안정시켜 정신을 맑게 하는 차의 효능을 적극 활용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는 <고려사>에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라는 의례가 그것이다. 중형주대의란 왕을 모시고 중형을 논의할 때 차를 마시는 의례를 실시하여 심신이 맑고 안정된 상태에서 국가의 중요한 의제를 논의했으니 참으로 고려인의 차의 응용이 지혜롭고 실용적이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한편 고려의 왕실에서는 차를 선진문물이며 귀한 물품이라 여겨 국가의 공신(功臣)이나 수행이 높은 수행승, 80세가 넘은 노인에게 차를 하사하였다. 이는 차를 하사하여 무명 장수뿐 아니라 맑고 고상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를 기원함으로써 왕의 덕치(德治)를 실현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한편 고려 시대 사원에서 행해지는 명전(茗戰)놀이는 승원에서 만든 명품의 햇차를 세상과 공유하는 문화행사였다. 당시 명전에 초청된 관료문인은 친 불교 인사로 수행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시와 고담준론을 나누는 문회(文會)로, 사원의 풍류를 상징하였다. 당시 차를 칭송한 이들의 시문은 융성하고 격조 높은 차 문화를 형성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고려 왕실이나 승원, 문인들은 단차(團茶)를 차 맷돌(茶磨)이나 다연(茶硏)에 갈아 가루를 만들어 하얀 거품, 바로 다화(茶花)를 피워내는 점다 방식으로 차를 즐겼다. 승원에서는 사미승이 삼매의 솜씨로 차를 내는 정황은 이연종의 <박치암이 차를 보냈기에 감사하며>에서 “사미승의 날낸 삼매의 솜씨로(沙彌自快三昧手) 찻잔 속에 새하얀 거품을 쉬지 않고 만드네(雪乳飜點不已)”라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물론 좋은 차를 즐기고 벗에게 차를 선물하는 풍조는 아름다운 미덕이라 하겠다. 그러나 차를 만들어 공납했던 백성들에겐 고통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차를 만드는 시기는 농번기와 겹친다. 그러므로 과도한 차의 세금의 징수는 백성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이런 백성의 어려움을 지적한 이는 이규보(1168~1241)였다. 그가 지은 <손한장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보내다>에 “관에서 감독하여 노약자도 징벌하네. 험준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 머나먼 개경에 등짐 져 날랐네. 이는 백성의 애끊은 고혈이니,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이른 것이라”라고 한 그것이다. 물론 차가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차에 대한 과욕은 결과적으로 백성에 고통을 줄뿐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왕실에서 차를 퇴출시키고 술로 대체한 연유는 이런 차의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출처: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30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