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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송유나의 역사 속 차 문화와 차 도구 이야기] 8. 차를 애호한 황제가 제작한 차도구에 대하여 – 건륭제 다관

  • 관리자
  • 2025-09-27   조회수 : 35

18. 차를 애호한 황제가 제작한 차도구에 대하여 – 건륭제 다관

  •  송유나 
  •  
  •  승인 2025.09.26 14:37
  •  
  •  호수 1795
 

청 건륭제의 차·백성 향한 식견·애정 담긴 다관

육우의 ‘다경’ 탐독해 차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심미안 습득
좋은 차 구하지 않는 이유·백성 노고에 느낀 뭉클함도 전해
명·청대, 산차·제다법으로 본질적 진수 추구하는 경향 탄생

 

노란 채색 바탕에 분채 장식이 들어간 청 건륭제 시기 황실용 다관. 한쪽 면에는 다화가, 다른 면에는 건륭제의 다시가 적혀 있다.
노란 채색 바탕에 분채 장식이 들어간 청 건륭제 시기 황실용 다관. 한쪽 면에는 다화가, 다른 면에는 건륭제의 다시가 적혀 있다.

위의 작품(홍콩다기문물관 소장)은 청나라 황제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6년) 시기 황실용으로 제작된 다관(茶罐)이다. 전체적으로 노란 채색 바탕에 화려하고 정교한 분채(粉彩) 장식이 들어간 다관의 바닥에는 대청건륭년제(大淸乾隆年製)라는 명문이 푸른 청화 안료로 적혀있다. 몸체 전면의 한쪽에는 다화(茶畵)가 그려져 있는데, 아름다운 정원 속 정자 아래에서 한 인물이 평상에 앉아 시동이 끓여 온 차를 받아 마시려는 장면이 있다. 그 반대쪽 면에는 건륭제가 지은 다시(茶詩)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냉천정(冷泉亭)에서 찻잎을 따는 것을 바라보며 지은 시’
한식(寒食) 이전의 찻잎은 너무 여리고, 한식이 지나면 잎이 억세진다. 오직 기화차(騎火茶)가 가장 품질이 좋다. 서호(西湖)의 용정차(龍井茶)가 예로부터 이름이 높아서, (나는) 한번 그 제다 방식을 보고자 (서호에) 왔다. 마을 사내들의 발길이 산꼭대기 아래로 잇따르고, 광주리를 기울여 (채다해 온) 작설(雀舌)과 응조(鷹爪)를 쏟아낸다. 아궁이에 계속해서 문화(文火)로 불을 때고, 뜨거운 솥에서 부드럽게 솔솔 저어 덖는다. 찻잎을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게 덖는 것에는 순서가 있으니, 차를 만드는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적지 않다. (내가) 왕숙(王肅)의 낙노(酪奴)에 대해서는 애석하게도 잘 알지 못하지만,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은 자세히 살펴보았노라. 내 비록 차를 공납 받고 있지만 좋은 차를 애써 구하지 않는 것은, (제다가 지나치게) 공교해질까 염려되어 이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찻잎 따는 것을 가서 보니 백성들이 새벽부터 고생이 많도다.
 -황제 건륭(乾隆)이 짓다.

청 건륭제는 북송의 황제 휘종(徽宗)만큼 차를 사랑하고 문예에 뛰어났는데, 그가 생전에 200여 편이나 되는 다시를 남긴 것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서호(西湖)의 용정차(龍井茶)를 사랑하여 직접 이곳에 와서 차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고 시를 썼다. 이 시의 제목을 보면 그가 냉천정(冷泉亭)에서 찻잎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다관에 그려진 그림이 그 모습을 묘사한 것 같기도 하다.

시에서 언급한 기화차는 절기상 한식(寒食) 바로 다음인 청명(淸明)에 맞추어 만든 차를 의미한다. 양력 4월 5~6일경인 한식절에는 불을 사용하지 않는 풍습이 있는데, 한식과 하루 정도 차이로 돌아오는 청명은 ‘새 불을 피워 개시하는 날’이라 하여 ‘기화(騎火)’라고 불린다. 그렇기에 한식과 청명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화전(火前, 불을 새로 때기 전), 그 이후를 화후(火後, 불을 때고 난 후)라고 하여 봄의 절기를 세분화한다. 화전은 청명 전이기도 하므로 명전(明前)이라고도 불린다. 때문에 찻잎을 따 만든 시점을 기준으로 기화차, 화전차(명전차) 등의 이름이 붙는다.

명·청대에는 찻잎을 다관에 넣고 끓인 물을 부어 우려 마시는 포다법(泡茶法)이 유행하였고, 이 탕법(湯法)에는 찻잎을 덖어 만든 산차(散茶)를 사용한다. 이런 탕법과 제다 기준에서 당시 사람들은 한식 이전의 찻잎은 너무 어려서 차를 우렸을 때 그 향과 맛이 충분히 우러나오지 못하고, 한식이 넘어가면 찻잎이 너무 자라서 떫은맛과 거친 기운이 커진다고 보았다. 그런 만큼 화전도 화후도 아닌, 그 중간에 해당하는 청명절에 잎을 따 만든 기화차가 차 본연의 맑은 청량함을 가장 잘 함양하고 있다고 여겼다.

작설(雀舌)은 ‘참새의 혀’, 응조(鷹爪)는 ‘매의 발톱’으로 어린 차 싹의 모양을 일컫는다. 이는 예로부터 귀하고 품질 좋은 차 싹을 은유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문화(文火)는 불을 약하고 부드럽게 때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부드러운 문화와 센 불인 무화(武火)의 적절한 조화로 화후(火候, 불을 살피는 것)를 보지만, 이 시에서는 여린 차 싹을 여린 불에 부드럽고 세심하게 덖는 것을 용정차 제다의 묘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왕숙(王肅)은 남조(南朝)에서 지내며 차를 즐기던 인물이었으나, 이후 북위(北魏)로 넘어오게 되었다. 북위 사람들은 차 대신 낙장(酪漿, 요거트의 일종)을 마셨는데, 이에 북위의 황제가 왕숙에게 차와 낙장 중 무엇이 더 나은지 비교하게 한 일화로부터 차를 ‘낙노’(酪奴, 낙장의 노예)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같은 일화를 보면 남조에도 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차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이에 건륭제는 왕숙이 마시던 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육우는 ‘다경’을 지어 역사상 처음으로 차의 생산과 제다, 탕법, 다구 등을 체계적이고도 자세하게 정리하였고, 건륭은 ‘다경’을 탐독하여 그 시대의 차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건륭 황제가 이렇게 차를 잘 알고 좋아하면서도 제다가 지나치게 공교해지는 것을 우려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제다와 탕법이 가장 공교하고 사치했던 시기는 단차(團茶)와 점다법(點茶法)이 유행한 송대였다. 이로 인해 차를 만드는 백성들의 고충이 컸고,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명나라 초기에 이르러 단차의 조공을 폐지하였다. 그리하여 명·청대에는 이전보다 간소화된 제다와 탕법인 산차와 포다법을 통하여 기교나 화려함보다 차의 본질적 진수를 추구하는 경향이 커졌다. 명·청대의 다인들은 번잡한 기교를 걷어낸 차의 단순한 본연성을 탐구하는 데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송대처럼 차의 만듦새가 필요 이상으로 공교해지는 일을 차의 정수를 해칠 뿐 아니라 백성들을 괴롭게 만드는 일이라고 여겼다.

차에 조예가 깊었던 건륭제는 차의 채다(采茶)부터 제다(製茶) 과정의 전반, 그리고 명차의 기준과 차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차에 대한 깊고 방대한 지식을 이 짧은 시 안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차를 만드는 백성들의 노고가 얼마나 큰지 이해하며, 차를 사랑하는 자신의 욕심이 자칫 제다의 본질을 흐리고 백성을 더욱 힘들게 할까 염려하고 있다. 정교한 문양과 다채로운 색상을 사용한 분채(粉彩) 장식의 화려한 다관에 새겨진 다시는 건륭제의 심미안과 더불어 다인으로서, 통치자로서 그의 섬세한 미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송유나 clda0cho@gmail.com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