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유나
- 승인 2025.10.17 08:47
- 호수 1797
아래의 다관(粉彩開光人物茶壺, 대만고궁박물원 소장)은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재위 시기에 만들어진 다관이다. 앞면에는 다화(茶畵)가 그려져 있는데, 경치 좋은 누각에서 시동이 화로로 찻물을 끓이고 선비는 평상에 기대어 앉아 차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뒷면에는 건륭제의 다시(茶詩) ‘비 내리는 날 서실에서 차 끓이며 누워 놀다가 시를 짓다[雨中烹茶泛卧遊書室有作]’가 쓰여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곡의 물안개와 산에서 내리는 비로 온통 뿌옇게 흐릿한데, / 얇고 성긴 옷을 입고 홀로 앉아 버들에 스치우는 바람을 쐰다네. / 대나무 화로, 찻잔에는 푸른 여울이 일고, / 미불(米芾)이 그린 서화 속 풍경과 다름이 없구나. / 솔바람 소리가 쏟아진 곳에 물고기 눈이 피어나니, / 중령(中泠)과 삼협(三峡)을 어찌 분별하리. / 청향(清香)과 선로(仙露)가 시 짓는 창자를 적시니, / 앉은 채로 어느새 꽃향기 가득한 제방을 맴도네.
비 내리는 날 물안개가 자욱하게 올라온 계곡가의 서실에서 대나무 화로로 차를 끓여 마시는 유유자적한 풍경과 차를 마신 후의 감회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이다. 건륭제는 시 속 풍경이 마치 북송대 화가 미불(米芾, 1051~1107)의 서화 속 모습과 같다고 하였다. 미불은 선 대신 점과 먹의 농담, 여백 등을 활용하여 비 내린 산수의 안개 낀 습윤한 풍경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꼽힌다. 그의 화법은 미법산수(米法山水)라 하여 원·명대를 거쳐 청대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의 그림에서 자주 차용되었다. 비 내리는 날 차 끓이는 풍경을 미불의 그림에 빗댄 점에서 문예에 뛰어난 황제였던 건륭제의 미적 소양이 잘 드러난다.
‘솔바람 소리’ ‘물고기의 눈’은 탕관(湯罐)에 찻물이 끓는 소리와 끓어오르는 기포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또한 그는 당나라 유박(劉博)과 육우(陸羽)가 명천으로 품평한 중령천(中泠泉)을 언급하며 찻물의 품수(品水)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고 있다. ‘맑은 향[ 清香]’과 ‘신선의 이슬[仙露]’은 차의 깨끗하고 신묘한 성질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어 ‘(차를 마셔서) 시 짓는 창자를 적시니 어느새 꽃향기 가득한 제방에 온 듯하다’라고 하며 오장육부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의 효능까지 은유했다. 이렇게 차에 조예가 깊었던 건륭제는 수많은 다시를 남겼는데, 특히 대나무 화로를 좋아하여 이 시에서처럼 대나무 화로를 자주 언급했다.
명·청대의 다인들이 사랑한 대나무 화로가 처음 만들어지고 이름을 알린 것은 명나라 초기 무석(无錫) 혜산사(惠山寺)의 주지였던 성해(性海)에 의해서이다. 혜산의 샘물[惠山泉]은 일찍이 당 육우가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은 물[天下二泉, 二泉水]로 꼽으며 오랫동안 명천(名泉)으로 간주되어 왔다. 성해는 혜산천 근처의 소나무 숲속에서 청송암(聽松庵)을 짓고, 솜씨 좋은 장인에게 의뢰하여 대나무 화로 하나를 만들었다. 위쪽은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화로의 겉면은 대나무를 짜서 씌웠는데, 그 안쪽은 금속으로 골조를 만들고 흙으로 살을 붙여 내벽을 삼은 모습이었다. 그는 청송암에서 이 화로로 차를 대접하였다. 화가 왕불(王紱, 1362~1416)을 포함한 여러 문인이 청송암에서 차를 마시고 대나무 화로를 주제로 그림과 글을 남기며 이것이 하나의 풍류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유명세로 인해 청송암은 명 만력(萬曆) 시기 화재로 중건되며 아예 죽로산방(竹爐山房)으로 개칭되었고, 청대에 이르기까지 대나무 화로와 혜산천으로 끓이는 차를 소재로 수많은 시·서·화 작품이 창작되었다.
차 애호가로 소문난 건륭제 역시 이 대나무 화로를 흠모하여 1751년(건륭 16) 그 유래지인 무석 혜산사의 죽로산방을 방문했다.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혜산사의 죽로산방을 본떠 옥천산(玉泉山) 청명원(靜明園)에 방 두 칸을 갖춘 자신의 죽로산방을 짓고 대나무 화로를 만들었다. 건륭제의 죽로산방은 옥천(玉泉)의 물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옥천의 물이 혜산의 물보다 더 좋다’고 평하며, 이곳에서 옥천의 물로 대나무 화로에 차를 끓여 마시며 대나무 화로를 찬미하는 여러 수의 시를 지었다. 위의 그림은 북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죽로산방도’(竹爐山房圖) 축(軸)이다. 옥천 죽로산방의 모습을 건륭제가 직접 그린 것이다. 현재 옥천의 죽로산방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건륭제와 명·청대 다인들이 ‘대나무 화로’에 대하여 보여준 열의를 통해 당시 차 문화의 독특한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명대로부터 청대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차를 향유하는 문인이 늘어나며 그들의 고아한 예술 취향과 심도 있는 학구열이 차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명·청대에는 차에 대한 논의가 다방면에서 더욱 다채로워졌으며, 찻물을 끓이는 데 쓰이는, ‘대나무 화로’라는 한 종류의 다구도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대나무로 겉면을 씌워 만든 이 화로는 실제 기능적인 면에서 우월하다기보다 ‘대나무’라는 소재의 상징성이 주는 가치가 크다.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는 고결함을 좇는 선비들의 시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대나무의 맑고 깨끗한 성질은 차와도 잘 어우러지는데, 대나무 숲이 드리운 그늘은 좋은 차가 생장할 수 있는 조건이며, 조릿대와 같은 종류의 댓잎은 완성된 차를 보관할 때 아주 유용한 재료로 쓰인다. 즉, 대나무는 문인의 오랜 벗이자 차와도 관계가 깊은 대상물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 다인들에게 대나무 화로는 고귀한 다구로 선망되었고, 오래도록 글과 그림 등 다양한 창작물을 낳게 하는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
송유나 clda0ch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