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유나
- 승인 2025.11.28 11:34
- 호수 18063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개 7세기 전후 당에서 선(禪)을 배워온 신라의 구법승들이 참선할 때 잠을 쫓기 위해 음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는 육우(陸羽)가 ‘다경(茶經)’을 집필한 8세기 중후반을 전후로 한 시기에 신라의 불가와 왕실에서 차를 마시고 활용한 사실이 확인된다. 9세기 초반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온 대렴(大廉)이 차씨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후기 신라(통일신라)의 사찰 터에서는 같은 시기 당나라에서 유명하였던 월요(越窯)와 형요(邢窯) 등에서 제작된 다완이 출토되는데, 차를 마시기 위해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는 한반도에서 차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간주한다. 중국으로부터 도자 제작 기술을 도입하여 청자와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하던 고려 요업의 초창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기종은 ‘다완’이었다.
17세기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 양질의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을 제외하면 오랜 시간 고려와 조선뿐이었다. 그만큼 당시 고도의 첨단 기술이었던 도자 제작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인 배경에는 차 도구의 자체적 수급에 대한 갈망이 컸던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찻물을 끓일 때 사용한 탕병(湯甁)이나 차를 우려내는 다관(茶罐)으로 쓰였을 법한 형태의 주자(注子)들이 출토품이나 전세품으로도 여럿 남아있으며, 사찰 터 등에서 다연(茶硏), 차 맷돌[茶磨]처럼 차를 가루 낼 때 사용한 차 도구들도 발견된다. 차 맷돌의 사용은 차를 가루 내어 마셨던 당시의 음다(飮茶)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후기 문신이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탕병을 비롯하여 차와 차 도구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에는 차 맷돌을 주제로 한 시도 있다.
琢石作孤輪 돌을 쪼아 바퀴 한 짝을 만들었으니
廻旋煩一臂 돌리는 데에도 팔 한 짝이 바쁘구나
子豈不茗飮 어찌 자네가 차를 마시지 않겠느냐만
投向草堂裏 (그럼에도 이 맷돌을) 나의 초당(草堂)으로 보내온 것은
知我偏嗜眠 내가 유난히도 잠을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所以見寄耳 이것을 나에게 부쳤으리라
硏出綠香塵 갈수록 푸르고 향기로운 가루가 피어나니
益感吾子意 그대의 마음이 더욱 고맙구나
- ‘동국이상국전집' 제14권 ‘차를 가는 맷돌을 준 이에게 사례하며 쓴 시’
1123년 북송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 1091∼1153)은 일종의 기행문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집필하였다. 그는 약 1개월간 고려에 체류하며 보고 들은 이 땅의 풍속과 제도, 문물 등을 그림과 함께 서술하였다(안타깝게도 현재 그림을 그린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이 책에는 고려의 차와 다구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산차(土産茶)는 쓰고 떫어서 먹기 힘들고,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하게 여긴다. (송 황실에서) 하사해 준 것 외에 상인들도 왕래하며 (차를) 판매한다. 그렇기 때문에 근래 들어 차 마시는 것을 제법 좋아하게 되어 다구를 만드는 것이 더 숙련되었다. 금화오잔(金花烏盞), 비색소구(翡色小甌), 은로(銀爐), 탕정(湯鼎)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뜬 것들이다.”
이 내용은 북송 사신의 입장에서 쓴 글이기에 고려의 차 문화를 낮추어보는 시각을 감안하여야 한다. 서긍의 주관을 걷어내고 글의 정보만을 파악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북송 사람인 나의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고려 사람들은 직접 차를 재배하고 만들어 마시고 있으며, 중국의 귀한 차들 또한 송 황실의 하사나 상인들의 거래를 통해 유통되고 있다.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꽤 즐겨 차 도구의 만듦새가 좋다. 금화오잔, 비색소구, 은로, 탕정 등은 중국의 것과 흡사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금화오잔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론과 의견이 있지만, 대개 당시 유행한 단차(團茶)와 그 탕법(湯法)인 점다법(點茶法)에서 애용된 흑유잔(黑釉盞)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층위에서 나오는 출토품들로 미루어보면 이 시기 흑유잔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에서 생산한 것 중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있는 ‘철채청자음각보상당초문완(鐵彩靑瓷陰刻寶相唐草文碗)’처럼 아주 희귀하게나마 청자에 흑유를 입혀 장식한 잔들이 남아있는데, 이런 것들을 금화오잔으로 지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송나라에서처럼 고려의 단차는 최상류층의 귀하고 사치스러운 향유품이었기에 그와 짝을 이루는 흑유잔의 유통이나 생산 또한 소량의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색소구는 청자로 된 작은 잔을 말하며, 은로와 탕정은 찻물을 끓이기 위한 은제 화로와 탕관(湯罐) 종류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서긍은 이 모든 다구가 중국의 것과 유사하다고 하였으나, 실제 고려시대의 도자 제작 기술을 비롯한 공예의 수준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간주하기에는 아주 정교하고 뛰어났다. 남송 태평노인(太平老人)의 ‘수중금(袖中錦)’에서는 “고려의 비색 청자가 천하제일”이라고 하였으니, 중국 내 이름난 수많은 명요(名窯)의 자기를 제쳐두고 고려의 비색 청자를 꼽은 것은 그 제자(製瓷) 수준이 대단했음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의 차 문화는 분명 우리나라의 그 어느 시기보다 융성했음이 확실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면이 없지 않다. 현재까지 전하는 고려의 수많은 아름다운 청자 그릇과 정교한 공예품 중에는 고려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차 문화의 기억을 품고 있는 것이 여럿 있을 것이다. 추후의 연구들이 이들을 가려내어 다구로서 잊힌 용도의 이름을 다시 붙여줄 날을 기다려본다.
송유나 clda0cho@gmail.com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2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