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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송유나의 역사 속 차 문화와 차 도구 이야기] 23. 우리의 찻그릇에 대하여 -2(끝)

  • 관리자
  • 2025-12-20   조회수 : 11

23. 우리의 찻그릇에 대하여 -2(끝)

  •  송유나
  •  
  •  승인 2025.12.12 10:57
  •  
  •  호수 1805
 

조선 찻그릇, 16세기 이후 일본서 선풍적 인기

초의·정약용·김정희, 조선 후기 쇠퇴했던 차 문화 부흥 이끌어
日, 소박·자연스러움 추구 와비차 유행하며 막사발 선호 심화
왜관 등서 주문 제작…임란 때 끌려간 사기장 일본 도자 견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고사주류도(高士舟遊圖)’. 간송미술관 소장.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고사주류도(高士舟遊圖)’. 간송미술관 소장.

고려 시대 융성했던 차 문화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큰 전환점을 맞는다. 이 시기 유교 국가인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강하게 실시하며 긴 시간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의 힘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가나 스님들이 주도한 차 문화는 쇠락하게 되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선비들 사이에서 차와 함께 고상한 풍류를 즐기는 문화가 다시금 꽃피게 된다. 중국에서 송나라 이후 스님과 황실 중심의 차 문화가 저물고, 명·청대에는 문인계층 중심의 차 문화가 새로운 축을 형성한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

그림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고사주류도(高士舟遊圖)’(간송미술관 소장)이다. 배를 타고 강가의 산수풍경을 즐기며 차를 마시는 선비들의 모습을 그렸다. 노 젓는 뱃사공의 맞은편에 선비 세 명이 둘러앉아 있고, 그 곁에서 시동이 부채질하며 화로에 올려둔 탕관(湯罐)의 물을 끓이고 있다. 이처럼 찻물을 끓이는 시동을 태우고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은 다른 그림들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도상이지만, 이광사는 실제로 벗과 더불어 차를 즐긴 인물이었다. 그의 문집 ‘원교집(圓嶠集)’에 따르면 그는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6~1770)의 서재에 드나들며 그가 내어주는 차를 하루 종일 마셨다고 한다. 벼슬보다 골동 수집에 취미를 두었던 김광수는 자신의 서재에 희귀한 공예품과 서화, 벼루를 비롯한 문방구류, 향(香), 중국 고저(顧渚) 지역 우전차(雨前茶) 등 이름 있는 차를 보관하고 감상하며, 이광사와 같은 친구를 초대하여 모임을 가졌다. 이는 명·청대 강남 문인들 사이에 유행한 아회(雅會)와 유사하다.

‘원교체(圓嶠體)’라는 자기만의 독특한 서체로도 유명하였던 이광사는 훗날 조선 차 문화의 부흥을 이끈 초의(草衣, 1786~1866) 선사의 수행처인 해남 대흥사(大興寺) 현판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이 현판의 글씨를 추사체(秋史體)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보고 비웃듯 평하며 초의에게 전한 글이 추사의 저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5권에 남아 있다. 이광사와 초의, 김정희, 대흥사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얽힌 다인 간의 민망하고도 공교로운 인연인 셈이다.

조선 시대 이후 사그라들었던 차 문화의 재부흥을 본격적으로 이끈 사람은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 등이다. 이들은 서로 깊게 교유하며 조선 후기의 자체적인 차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특히 초의 선사가 명대 장원(張源)이 쓴 ‘다록(茶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정리한 ‘다신전(茶神傳)’에는 차의 제다법(製茶法)을 비롯하여 탕법(湯法), 좋은 차의 조건, 차를 마실 때 필요한 다구(茶具)에 대한 설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찻잔에 대해서는 “설백색을 띠는 것이 좋고, 푸른 백색이 도는 것도 차색을 해치지는 않으므로 그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청자보다 백자가 주류였던 까닭도 있지만, 이 시기 유행한 음다법(飮茶法)과도 관계가 있다. 찻잎을 끓인 물에 우려내어 맑게 마시는 포다법(泡茶法)에는 잔이 깨끗한 백색을 띠는 것이 차색을 살피고 감상하기에 가장 좋았다.

그런데 조선 시대 찻그릇의 제작은 내수보다는 조선 밖, 의외의 곳에서 큰 조명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일본이다. 14세기 원나라의 닝보(寧波)에서 고려를 거쳐 일본 규슈의 하카타(博多)로 향하던 중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무역선 ‘신안선’에서는 소량이지만 청자로 된 완과 주자, 약이나 차를 간 것으로 추정되는 절구 등이 함께 나왔다. 그렇기에 고려의 찻그릇과 다구가 이미 일본에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일본에서 한국의 찻그릇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을 때는 대략 16세기부터이다.

기록상 일본에서 한국의 찻그릇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 말에서 전국 시대 초 고관이었던 산조니시 사네타카(三条西実隆, 1455∼1537)의 일기 ‘실륭공기(實隆公記)’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여기에는 “일련종의 승려가 와서 고려다완을 선물로 주었다”는 1506년의 내용이 담겨 있다.

고려다완은 반드시 고려 시대의 다완을 특정하여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중국에서 넘어온 도자기나 귀중품을 ‘당물(唐物)’로 표현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건너온 다완들, 대개 조선의 다완을 아울러 고려다완이라고 통칭하였다.

이후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1422 또는 1423~1502),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1502~1555), 센리큐(千利休, 1522~1591)로 이어지며 완성된 ‘와비차(わび茶)’가 유행하면서 고려다완에 대한 애호 현상을 키웠다. 와비차는 선풍(禪風)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점을 선호하였는데, 이런 미감에 고려다완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들은 대개 조선에서 들여온 막사발이었으며, 본래 다완의 용도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거친 듯 투박하고 고졸한 느낌이 있었는데, 와비차에서는 이 점을 오히려 귀하게 여겼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막사발을 단순히 수입해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 전후 시기에는 왜관을 비롯한 부산 등지의 가마에서 그들의 취향과 필요에 맞는 다완을 직접 주문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어 임진왜란(1592~1598)을 일으킨 후에는 조선의 사기장을 강제로 끌고 가 이들에게 여러 도자기와 다완을 직접 제작하도록 하였고, 이는 일본 도자 제작에 큰 변혁을 가져다주었다. 이처럼 조선이 일본의 다구 사용과 제작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으며, 이는 충분히 자부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이 사랑한 찻그릇을 제작하고 기술력을 제공한 것은 조선이지만 그 활용과 의미 부여의 주체는 일본이었다. 그렇기에 이는 자칫 우리가 이루어 온 차 문화나 다구의 미감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맹점을 인지할 필요도 있다.  <끝>

송유나 clda0cho@gmail.com

출처: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2918)